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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읊조림(일백 열하나)

by 시인촌 2007. 5. 25.

새벽으로 가는 길목인 새벽 두시쯤 잠이 들어

아침 여섯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간에 일어났습니다.

중학교 때부터 지금껏 삼십년 동안

그날 자서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에 길들여져 있으니

특별히 다를 것도 없는데

세수하러 욕실로 들어가니 진땀나고 머리가 빙 도는 게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식구들 아침 먹을 쌀을 씻어 담그고

늦은 시간 함께 잠든 남편이 작은 소리에도 깰까봐

최대한 소리를 낮추고 집을 나섰습니다.

 

 

부처님오신 날인 오늘 목요일,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에

통영으로 해양활동 떠날 예정이었던 아들 녀석을

상의 끝에 보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기에

인솔 선생님을 직접 만나 참가하지 못함을 알리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약속시간 학교정문으로 갔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 하나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한 달 전쯤 멀쩡하든 휴대폰이 저장되어있던 수많은 전화번호를

날름 삼켜 버리고는 토해낼 기미를 보이지 않아

하는 수 없이 새 휴대전화를 구입했습니다.

새로 장만한 휴대전화는 뭐든 씩씩하게 잘할 거라 믿는 마음과 달리

마음 한구석 여전히 어리게만 느껴지는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과

영상통화를 하기 위해서 둘 다 SHOW를 구입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지금 아픈 몸으로

나만 사용하는 노트북에 토닥거리는 것은 아닙니다.

 

 

노트북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어린이날 선물로

두 아이에게 옷이랑 평소 갖고 싶어 했던 물건들을 사주는 남편한테

"자기야, 오늘만 나도 어린이 하면 안 돼?"

이 말에 남편이 흔쾌히 노트북 사줄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어린이날에 어린이도 아니면서 자기보다 더 비싼 선물 받았다고

아들 녀석으로부터 한껏 부러움을 산 나는 남편에게는 고마운 마음이

두 아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인 내가 십년동안 사용한 컴퓨터가

이번 노트북을 포함해 벌써 4대째이니

2년 전 전용 컴퓨터를 처음 마련한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의 부러움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5분을 넘기고 10분을 기다려도 누구 하나 약속장소로 오는 이는 없었습니다.

결국 비가 온다고 하니까 다른 날로 연기를 했나보다 생각하고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학교로 전화를 해서 인솔선생님 휴대번호를 알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으나

혹여 라도 늦은 시간 잠들었을지도 모를 숙직선생님을 깨우기는 정말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궁금증을 묻어두기로 했습니다.

휴대전화에 있던 모든 정보를 잃어버리기 전까지는

아이들에 관한 필요한 전화번호는 알고 있었는데

해양활동 하러 가는 날 직접 만나서 물어봐도 되겠다 싶어 미루었던 게

오늘 같은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담당선생님께서 해양활동을 정상적으로 떠나는데

아들 녀석이 나타나지 않은데 대한 전화든

비 소식으로 무기한 연기가 되어 연락한다는 전화든 간에

아무튼 한통의 전화도 없음에 대해서는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오늘 아픈 몸을 이끌고 아침 식사는 어찌 어찌 준비해서

가족들이 맛있게 먹을 수 있게 준비했는데

정작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목이 아픈 것과 어지러운 건 참을 수 있겠는데

가슴 통증과 토함은 참기 어려웠습니다.

먹은 게 없으니 말간 물만 나왔지만

아무튼 결혼 17년 차로 살아가는 동안

어지간해서 식구들 두고 낮에 눕는 일이 없지만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침대에 누웠습니다.

 

 

열어둔 문으로 남편이 설거지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두 아이의 도란거리는 소리도 들립니다.

식구들은 아래층에 있고 나는 위층에 있어

식구들 얼굴은 일일이 살필 수 없으나

가족들이 나를 위해 배려하는 그 마음을 알기에

통증조차도 잊은 채 어느 순간 잠이 들었습니다.

얼마나 잤는지 아들 녀석이 점심을 먹으라고 나를 흔들어 깨웁니다.

아빠가 엄마를 위해서 ‘본죽’에 가서 전복죽을 사왔다며 힘들어도 일어나라고 말하며

팔, 다리, 어깨 여기저기를 번갈아 가며 주물러 댑니다.

"너희들 점심은? "하고 물으니 아빠가 롯데리아에 가서 이것저것 사 가지고 왔다며

이마도 만져보고 손도 만지고 엄마인 나를 안쓰러운 얼굴로 바라다봅니다.

아빠를 닮아서 참으로 따스한 아들, 내 자식이지만 너무도 사랑스러운 아들입니다.

 

 

가족들의 관심과 사랑덕분에 죽도 먹고 약도 먹은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컴퓨터 앞에 앉아 글을 쓸 만큼 좋아졌습니다.

여전히 가슴통증과 어지러움,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은 울렁거림은 있지만 말입니다.

의사는 말합니다.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모든 것의 원인은 피로에서 온다고...

알면서도 내가 좋아서 하는 수많은 일들을 줄이기도 멈추기도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이 너무도 내게 할 일이 많다고 속삭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전히 나 자신을 위해서 배울 것이 많음이 너무도 행복합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기쁘게 해주어야 할 것 역시

많다는 사실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처음 눈뜬 사람처럼 보이는 것마다 경이로운 나는

여전히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많아 행복한 사람입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내가

나는 너무도 좋습니다.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따스한 시선을 가진 내가 자랑스럽기까지 합니다.

몸은 아파도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마음은 누구보다 건강합니다.

이런 기분이면 오늘밤은 아프지 않고 잠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7년 5월 24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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