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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일본역사문화 탐방 사흘째(2007년 8월 2일) - 이희숙

by 시인촌 2007. 8. 31.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 되어있는 청수사(기요미즈테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른 언덕으로 되어 있었는데 양쪽 길에는 시니세(노포)로 불리는 오래된 전통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그곳을 지나치면서 뭐든 작게 만들기로 정평이 난 그들의 실용주의 정신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청수사는 어디에 서서 어떤 각도로 보아도 절 고유의 멋스러움이 잘 드러나는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여느 절에서 볼 수 없는 청수사의 절 지붕은 놀랍게도 노송껍데기로 이어져 있었다. 일본의 절은 보통 절 따로 신사 따로 인데 '지주신사(지슈진쟈,地主神社)'는 청수사 안에 있다는 점이 특이했다. 신사는 잡신을 모시는 곳이고 절은 부처를 모시는 곳으로 이해하면 되는데 인연을 맺어주는 신이 머무는 곳이라는 '지주신사에서 나를 둘러싼 인연들을 생각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 사람 한 사람 떠올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복이 많은 사람인가를 새삼 기억해내면서 내게 닿았던 인연 모두의 건강과 행운, 행복을 기원했다.

 

 

절 곳곳을 구경하던 중 사랑을 점쳐주는 신이 깃든 '연애를 점치는 돌', 일명 러브 스톤(LOVE STONE) 앞에서 은근슬쩍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이제 겨우 초등학교 6학년인 아들 녀석에게 러브 스톤에 적힌 문구대로(눈감고 한쪽 돌에서 출발해서 다른 쪽 돌에 닿으면 사랑이 이루어진다)해보라고 부추겼다. 순진한 아들도 먼 훗날 자신에게 일어날 사랑이 궁금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하니까 재미삼아여서인지 아무튼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눈 감고 맞은편 돌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이내 정확하게 돌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아들 녀석이 대단한 큰일을 해낸 것 마냥 기분이 좋아져서 녀석의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주었다. 청수사에는 성스러운 샘물이 있는데 건강, 사랑, 지혜 중 한 가지만 생각하면서 마시면 소원성취 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아들과 나는 모든 것의 시작일 수 있는 건강을 생각하면서 마셨다. 건강해야만 사랑도 할 수 있고 지혜롭게 뭐든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청수사 곳곳을 누비는 동안 준비해간 세 개의 카메라는 풍경사진이며 인물사진 가리지 않고 찰칵 찰칵 찍어대는 주인 덕분에 쉴 새 없이 바쁜 신세가 되었다. 주차된 차로 돌아가던 중 말로만 듣던 청수사의 또 다른 모습(139개의 기둥으로 지지되어 지상으로부터 15m 높이에 떠있음)을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오래도록 올려다보았다.

 

 

일본의 국보인 삼십삼간당(三十三間堂)의 당(堂)은 기둥과 기둥 사이가 33 있는 것부터 33간당이라 불리는데 120미터에 달하는 긴 본당건물이 비좁게 보일 정도로 늘어서 있는 1001개의 천수관음상은 재료가 히노키(편백나무)고 제작방법은 신체의 여러 부분을 따로 만들어 조립했으며 머리 위 11의 얼굴과 40종의 팔로 표현되었다고 한다. 1001개에 달하는 천수관음상의 규모며 웅장함에 놀라는 것도 잠시 각기 다른 표정의 33보살을 살펴보는 재미는 직접 눈으로 보지 않고는 그 즐거움을 말하기 어려울 만큼 간사이(교토, 나라, 오사카)지방을 여행하는 이들에게 꼭 한번 들러보라고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곳이 되었다.

 

 

삼십삼간당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귀 무덤(이총·耳塚)으로 향하던 도중에 붉은 벽돌(국가 중요 문화재)과 르네상스 양식 건물이 보기에도 아름다운 교토박물관을 만났다. 교토박물관은 나라, 도쿄 박물관과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3대 박물관이라고 했다. 개인적으로 고미술품에 관심이 많은 나는 일본, 중국, 우리나라 고미술품이 만여 점 전시되어 있다는 그곳에 들르고 싶었지만 여행일정에 포함되지 않은 관계로 일행과 함께 박물관에서 채 100m도 되지 않은 곳에 위치한 귀 무덤으로 향했다.

 

 

귀 무덤은 교토에 있는 임진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시는 신사인 도요쿠니신사(풍국신사·風國神社)가 자리한 건너편에 있었다. 그곳을 찾은 일행들은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가 되어 저마다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일본과 임진왜란 당시 조선 민중이 겪어야 했던 수난의 역사에 대해 한마디씩 했다. 귀 무덤 앞에 세워진 안내판(귀 무덤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적군의 목 대신 조선인의 코나 귀를 소금에 절여서 일본에 가지고 돌아갔는데 이러한 전공품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이곳에 매장되어 공양의식이 거행되었다......)을 읽던 나는 통곡하고 싶도록 가슴이 저리고 아팠지만 아무 쓸모도 없는 자존심(우는 나를 혹 다른 이들이 이상하게 여길까봐서)때문에 울지도 못하고 끓어오르는 울분을 삭여야만했다. 이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아들 녀석이 귀 무덤 사진을 몇 장 찍으며 “돌아가면 이 사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세요. 특히 독도수호대 사람들에게 이 사진 보여주고 독도를 절대 일본에게 빼앗기는 일 없도록 하세요.”하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마냥 어린 줄만 알았던 아들 녀석이 얼마나 의젓하게 느껴지던지 그 다음 말을 어떻게 이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나는 감동했고 적잖이 흥분해 있었다.

 

 

정말이지 일본인들은 참으로 무서운 자들임에 틀림이 없다. 20만 명에 달하는 귀, 코 무덤 주인이 조선인이란 걸 뻔히 알면서도 어떻게 그들의 사적지로 만들 생각을 했는지, 그것도 건너편에 임진왜란을 일으킨 주동자를 모시는 신사가 있는데... 착찹한 심정을 달랠 길 없어 귀 무덤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교수님께서 박삼중 스님께서 원혼을 달래는 재를 지내주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언제인지 기억조차 가물거리지만 텔레비전에서 그 소식을 접한바 있는 나는 박삼중 스님이 참으로 큰일을 해내셨구나 하는 생각에 새삼 코끝이 찡해왔다.

 

 

벚꽃 핀 봄이 더 아름답다는 니죠성(二條城)은 199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장군의 숙박지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천하의 실권을 장악하게 된 세키하가라 전투에서 승리한 뒤 교토로 입성할 때 거성으로 삼았던 곳인데 1603년에 짓기 시작해 3대 장군인 도쿠가와 이에미쓰때 규모를 단장했다고 전해져 내려온다. 니죠성을 찾은 시간이 12시를 전후한 시간이었기에 너무 더웠다. 더운 날씨 때문에 걷는 것도 힘든데 촬영금지라는 꾀꼬리 복도(니노마루고텐)앞에서 가지고 간 3개의 카메라 중 가장 늦게 산 디지털 카메라 하나를 떨어트리고 마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그 일로 인해 아들과 나는 관광도 뒷전이고 아무런 반응 없는 카메라를 어떻게든 정상으로 돌려놓겠다며 고장 난 카메라에 신경 쓰느라 정작 걸으며 만난 건물들을 대충대충 보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그런 이유로 자객이 들어와서 마루를 디디면 삐이삐이 하고 새 소리가 나도록 마루 아래에 뭔가 설치했다는, 그래서 어여쁜 새소리가 난다는 마루 위를 걸어보지 못했던 점이 일본여행에서의 가장 아쉬운 일이 되고 말았다.

 

 

니죠성의 니노마루 정원은 일본 정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중앙에 연못을 두고 샘을 상징하는 돌 좌우에 학과 거북이 모양의 돌을 배치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도 전체를 한꺼번에 볼 수 없도록 한 카이유식 정원이 니죠성의 웅장한 외관에 밀려 오히려 답답하다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다른 여행객들처럼 정원을 배경으로 한 사진 찍기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일본성의 특징 중 하나가 해자인데 이곳 니죠성은 2중 해자로 되어있었다. 성벽을 따라 외곽으로 물이 흐르게 하고 성안쪽 물이 흐르는 곳을 따라 또 벽을 쌓는, 원래 성이란 방어가 최우선이긴 하지만 성 밖 군사보다 성 안 군사가 세배는 더 많아야 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들이 왜 이중 해자양식을 고집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아무튼 니죠성은 난공불락(難攻不落 )인 셈이다.

 

 

니시진 직물회관에 들러 양잠과 견직을 직접 짜는 것도 구경하고 기모노 장식과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이 즐비한 상품들도 구경하고 기모노 쇼도 관람했다. 기모노 쇼 관람 도중 사진을 찍느라 하나 둘 일어나는 중국인들 때문에 결국 쇼 관람 도중에 나와야만 했다. 영어로 한국어로 바디랭귀지(body language)로 아무리 앉으라고 소리쳐도 들은 척도 않는 그들을 보며 끝까지 질서 지키는 일행들이 그렇게 고맙게 느껴진 적도 없었다. 누구라도 다른 나라를 여행할 때에는 아주 사소한 것으로라도 나라와 국민전체에게 욕을 먹이는 행동은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던 순간이었다. 기모노 쇼가 열리는 그곳 니시진 오리회관에서 일본튀김정식을 먹고 금각사로 향했다.

 

 

세계문화유산인 금각사(金閣寺)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톡톡 떨어지기 시작했다. 준비해온 우산이 여행용 가방 안에 있으니 꺼내기도 뭣하고 해서 내리는 빗줄기가 오히려 더 운치 있다며 우산 쓴 이들보다 더 신난 모습으로 산들산들 불어대는 바람인양 걸었다. 비가 온다고 모자에 우산에 난리를 쳐대든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비는 이내 소리 소문 없이 그쳤다. 세계에서 건물을 짓는데 가장 많은 금을 사용했다는 금각사(金閣寺 긴카쿠지)는 원어 발음 표기인 긴카쿠지 보다 한자음을 한국어식으로 그대로 읽은 금각사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아시카카 장군이 심었다는 600년 된 소나무가 있다는데 사진 찍다가 잠시 일행에서 이탈한 이유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도 소나무가 있는 위치로 가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오랜 세월동안 금각사와 함께 해 온 소나무는 끝내 만나지 못했다.

 

 

누각 주변에는 아름다운 연못인 경호지(鏡湖池 교코치)가 있고 누각꼭대기(천정)에는 청동봉황이 있는데 바닥면을 제외하고 전체 정자는 순수한 금박으로 덮여 있다고 했다. 이 정자는 부처의 유품들을 모시는 샤리덴으로써 기능한다고 간사이역사문화탐방 팀을 이끈 교수님께서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이름 그대로 누각을 금으로 코팅해서 입힌 건물인 금각사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찔할 정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1397년부터 10년에 걸쳐 제3대 아시카가 장군(37살에 승적)이 세운 누각으로 그가 죽은 후 유언에 따라 절로 바뀌게 되었다는 원래의 금각사는 1950년 금각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금각과 하나가 되고파 금각사를 불태웠다는 하야시 쇼켄이라는 한 사미승에 의해 연소되고 이 사건의 가상화된 판본은 일본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장편소설<금각사>의 중심이 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955년에 다시 지어진 것인데 누각은 3층 구조로 되어 있고 1층은 왕실 침실, 2층은 사무라이 침실, 3층은 중국 선종 불전으로 되어있다. 주택과 불전을 겸한 독특한 건물인 금각사는 교토 시내가 아닌 히가시야마를 향해 지어져 있고 누각 앞 두개의 모래더미는 중국의 유명한 산들을 표현한 것으로 달빛 감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그림엽서에 빠지지 않고 나오는 금각사 출구 쪽에 위치한 선물코너에서 기모노 입은 여성의 모습이 들어있는 액자 하나를 사고 오사카에 있는 면세점과 최대번화가인 도톤보리, 신사이바시 문화체험을 위해 이동했다. 문화체험을 하는 동안은 개인의 자유시간이 주어졌기에 아들과 나는 이곳저곳 참 많이도 돌아다녔다. 제일 처음 들어간 면세점에서는 부채형 모양의 장식용 접시두개와 디오르 선글라스, 지포 라이터, 주방용 칼, 하이테크 볼펜 등을 샀고 최대번화가인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 문화체험을 하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 편의점에 들러 니죠성에서 고장 낸 디지털 카메라 대신 일반 카메라를 사용하기 위해 필름과 건전지를 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어찌된 영문인지 고장 난 카메라 말고 멀쩡하던 두 개의 카메라도 영 말을 듣지 않았다. 찍혔다 안 찍혔다 말썽인 카메라를 가지고 씨름하기에는 시간이 아깝고 해서 최대번화가인 도톤보리와 신사이바시 풍경은 몇 장 찍은 걸로 만족해야만했다. 

 

 

일본을 두고 흔히들 오락 천국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 말이 실감날 정도로 최대번화가인 도톤보리에는 대형 오락실로 넘쳐났다. 게임을 좋아하는 아들 녀석을 위해 오락실로 들어갔는데 종류는 또 얼마나 많은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운데 혼자 하는 게 미안했던지 아들 녀석은 자꾸만 엄마도 하세요. 라고 부추겼다. 아들의 성화에도 아랑곳 않고 아들 녀석이 하는 것만 지켜보다가 거리로 나왔다. 오후 4시를 막 넘긴 시간, 번화가를 증명하듯 거리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아이스크림 가게 앞에는 열 명도 더 돼 보이는 사람들이 줄지어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차례가 되려면 멀었다 싶어 실물크기의 아이스크림 모형이 진열된 앞에서 어린아이처럼 좋아라하고 사진을 찍었다. 처음 맛본 일본아이스크림은 뜨거운 불 위에 둥글고 납작하게 구워 만든 빵 비슷한 걸 가지고 아래는 좁고 위는 넓은 모양의 보통 아이스크림 과자처럼 만들어 그 안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담아주었는데 뜨거울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먹는 보통 아이스크림처럼 차가웠다. 맛을 이야기하자면 아이들이 좋아하는 베스킨라빈스31 맛과 작년 1월 딸아이와의 오클랜드 여행에서 맛본, 오클랜드에서 차로 약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바닷가 도시인 미션베이에 들르면 꼭 한번은 맛보아야한다는(와플처럼 생긴 넓은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담아 주는)아이스크림의 맛을 섞어 놓은 듯 했다. 이국땅에서 맛 본 아이스크림 하나에 느닷없이 날아든 그리움, 그 순간 내 마음은 온통 이번 여행에 합류하지 못한 딸과 남편 생각에 사로잡혔다.

 

 

일본어는 간단한 인사와 물건을 살 때 필요한 말만 배우고 익혔기에 여행을 하는 동안 불편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영어를 못하기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어설픈 영어지만 영어는 통했다. 무엇보다 다 쓸 수는 없지만 일상생활에 사용되는 한자는 거의 읽을 줄 알고 뜻이 뭔지를 해석할 줄 알기에 여행하는데 있어 특별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너무 많은 곳을 다녔던 탓에 저녁식사 후 휴식을 취할까도 생각했지만 일본 제2의도시며 상업의도시라는 오사카의 번화가를 앞에 두고 그냥 잠들기는 왠지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에 여행 첫날 배에서 룸메이트(room·mate)가 된 가족들과 오사카 밤 구경에 나섰다. 밖으로 나와 직접 만난 오사카의 밤은 묵었던 리가 그랜드 호텔방에서 바라본 풍경만큼은 아니어도 나름의 질서와 멋을 느낄 수 있어 좋았다. 특별한 음식 체험과 볼거리, 살거리를 찾아 거리를 걷고 또 걸어도 아! 바로 이거야, 내가 찾던, 내가 맛보고 싶었던, 내가 만나고 싶은 느낌... 그런 감동을 기대했지만 호텔로 돌아오는 시간까지 끝내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만 빼면 그 날 하루는 정말 여행을 오긴 왔구나 하는 실감이 제대로 와 닿은 꽤 괜찮은 하루였다.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