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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탐방 나흘째 그리고 뜻하지 않은 사고(2007년 8월 3일~ 4일) - 이희숙

by 시인촌 2007. 10. 17.

조식 후 일본의 3대 성 중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오사카성(大阪城)으로 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권력의 상징이기도한 오사카성은 멀리서 봐도 그 아름다움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화려했다. 각기 다른 건물이며 아름다운 주변 환경이 눈길을 사로잡는 오사카성은 일본성의 특징인 해자로 인해 한눈에 봐도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성에 도착하자 예고에도 없던 비가 내렸다. 지나가는 비려니 생각하고 매표소 앞에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지만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내리는 빗속을 손수건으로 머리만 가리고 성 안으로 뛰어들다시피 들어갔다. 규모로 보면 일본 제일인 오사카 성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철저히 파괴되고 확장되어 지금 남은 성곽과 망루 등은 모두 도쿠가와 가문이 재건한 것이라고 했다. 그 외 건물은 1931년 오사카 시민들이 콘크리트로 다시 복원했는데 그 때문인지 가까이에서 본 건물의 느낌은 멀리서 바라볼 때만큼의 아름다움에 훨씬 못 미쳤다.

 

관광지 어디를 가나 상업적이지 않은 것이 드문데 오사카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본 사무라이 복장을 갖춰 입고 한손에는 마음에 드는 칼을 골라잡고 머리에는 자신의 몸무게와 머리 크기를 생각해서 고른 투구를 쓰고 사진을 찍는데 300엔의 돈이 필요했다. 300엔을 내고 정해진 장소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한 아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나오는데 어느새 하늘은 맑게 개어있었다. 커다란 모자를 쓴 채 오사카성 여기저기에 서서 여행객들의 시주를 기다리며 말없이 목탁만 두드리고 있는 여럿의 스님들을 뒤로 하고 다음 목적지인 구로몬 시장으로 향했다.

 

구로몬 시장 (黑門市場)은 시장이 형성될 당시 주변에 있던 엔메이지(圓明寺)라는 절 대문이 검어서 붙인 이름인데 오사카에서는 제일 큰 식료품 도매시장이며 지하철 센니치마에센(千日前線)과 사카이스지센(堺筋線) 니혼바시(日本橋)역 히가시구치(東口) 쪽으로 형성되어 있는 서민적인 시장이다. 우리 일행이 들른 시간이 아침 식사를 한지 한참 지난 시간이라 그런지 시장에는 물건을 구입하러 나온 사람도 드물고 진열된 규모도 도매시장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영세했다. 이유를 알아보니 구로몬 시장은 새벽에 활기를 찾는 곳이라고 했다. 물가가 비싸기로 유명한 일본이지만 수박 한통을 가지고 여섯 조각내지 여덟 조각으로 나눠 한 조각씩 파는 걸 보고는 그동안 내가 얼마나 풍족한 삶을 살았는가 하는 걸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해산물이며 치킨, 튀김 등 무엇 하나 우리나라 환율 차를 감안한다고 해도 일본은 물가가 비싼 나라임에 틀림이 없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뭐든 말하라고 하는 내게 음식 값부터 먼저 살피는 아들은 너무 비싸다며 먹지 않겠다고 했다. 구로몬 시장을 둘러 본 느낌은 나라는 부자지만 개인은 가난하다는 소문 속 일본의 진실을 재확인한 셈이 되었다. 검소해야만 잘살 수 있다는 일본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동양도자기 박물관을 둘러본 느낌은 안타까움 그 이상의 무거움, 무거움 그 이상의 슬픔, 슬픔 그 이상의 아픔, 아픔 그 이상의 분노, 분노 그 이상의 각오와 희망이 분명 있었다. 물론 이건 내 속에서 느끼는 혼자만의 감정이었지만 말이다.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의 도자기가 전시되어 있는 동양도자기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도자기 중 절반 이상이 우리나라 고려청자와 조선백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많이 전시되어있었다.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그곳 박물관으로 옮겨 놓은 듯해서 마음이 무거웠지만 한편으론 그곳을 찾는 세계 여러 나라 관광객들에게 우리나라의 도자기기술과 수준을 알리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점심은 회전초밥점에서 먹었는데 밀려드는 손님으로 인해 한참을 기다려야했다. 평소 양식보다 일식을 더 좋아하기에 많이 먹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이상하게 당기지가 않아 베고픔만 면할 정도로 먹고는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행 중 어떤 이들은 간만에 실컷 먹어본다며 쟁반이 탑을 이루도록 먹고 또 먹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 3시 즈음에 오사카 남항으로 이동해서 출국수속을 마치고 부산향발 PANSTAR에 승선했다. 일본으로 올 때와 달리 부산으로 돌아갈 때는 배에 적응된 때문인지 어지럽지도 않고 지낼만했다.

 

평소 비행기 여행을 다닐 땐 읽을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배 멀미하면 읽는 것도 버겁겠다 싶어 책을 준비하지 않았더니 꺼리하나가 줄어 텔레비전을 보거나 선상에 나가 바깥풍경을 보거나 룸메이트와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 나누거나 그도 저도 아닐 땐 사우나를 하며 지냈다. 저녁을 먹고 선상 노래자랑 구경에 나섰다. 룸메이트가 된 아줌마의 아들이 노래자랑에 나간다기에 응원도 할 겸 시간 보내기도 좋겠다 싶어 갔는데 중3인 그 아이는 노래실력은 보통인데 무대를 휘어잡는 매너가 어른보다도 더 뛰어났다. 덕분에 그 아이가 부른 "땡벌"은 많은 박수갈채를 받아냈고 2등이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일본역사 문화탐방을 하고 8월 4일 오전 부산항에 입항하는 걸로 되어있었던 여행일정은 8월 3일 새벽 3시 20분경 뜻밖의 사고로 인해 10시간 이상을 꼼짝없이 배에서 지내야만 했다. 새벽녘 쿵하는 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설마 사고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는데 우리가 탔던 PANSTAR SUNNY호를 일본선박이 후미에서 들이박는 사고로 일어났다는 걸 사고발생 후 4시간이 지난 아침에서야 알게 되었다. 선상방송을 통해 뒤늦게 사고소식을 접한 승객 503명은 두려움과 놀라움에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책회의는 시작되었지만 선장이 일본해상청에서 나온 조사단에 의해 조사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 참석할 수 없었던 이유로 해결방안을 위한 합의점을 이끌어내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 일정에도 없던 선상에서 점심과 저녁 두 끼를 먹어야만했다.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가족들에게 연락하려는 사람들로 로비는 붐볐다. 내 휴대전화는 해외에 나오면 자동로밍 되니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하는 불편은 겪지 않아도 되었지만 여행하는 동안 해외통화를 많이 했기에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빠져 나가고 없는 시간, 공짜 싫어하는 사람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로비에 설치된 전화를 이용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본해상청의 조사를 받기 위해 멈춰 서있던 시모노세키를 출발해서 부산으로 오는 사이 사고 대책회의를 처음 열었을 때 일인당 3만원을 주겠다는 선박회사의 제의는 결국 일인당 3만원에 가는 목적지까지 대도시별로 교통편을 제공하는 선으로 마무리되었다. 배에서 만난 경험은 몇 만분의 일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지만 정상적으로 항해 했을 때 걸리는 시간에 예정에도 없던 10시간을 배에서 갇혀 지내는 동안 아들 녀석은 하루에 사우나를 세 번씩 하는 웃지 못 할 풍경을 연출했다. 계획대로라면 8월 4일 오후 1시 30분 즈음 대구도착이지만 마중 나온 남편의 차를 타고 집으로 오니 밤 12시를 넘겨 결국 날짜로는 8월 5일이 되어버렸다.

 

아들과 함께한 일본여행(나라, 교토, 오사카 - 간사이 지방), 돌아오는 길에 만난 사고로 인해 힘은 들었지만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느낀 것도 많았기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여행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 세계문화유산(17개)이 많기로 유명한 도시인 교토도 그리울 것이고 젊음의 거리인 오사카 최대번화가인 도톤보리, 신사이바시도 궁금할 것이고 달리는 차안에서 바깥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쉴 새 없이 셔터를 눌러대던 아들 녀석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그리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아파트와 달리 창문이 없는 발코니에 집집마다 가득 널려 있던 빨래도 정겨운 풍경처럼 더러 떠오를 것이고 익히지 않아 어떻게 먹느냐고 걱정을 했지만 막상 회전초밥전문점에서 8개나 먹어 나를 놀라게 했던 아들 녀석의 의젓한 모습도 그리울 것이다. 무엇보다 자기다운 정체성을 위해 우리가 노력해야 할 점과 밤중에도 뛰어 올 세 사람을 만들라는 교수님의 말씀은 오래도록 내가 어떤 사람으로 존재해야하는지를 기억하게 할 것이다.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