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비가 내려서인지 오후 세시를 막 넘긴 풍경이 촉촉하게 젖은 연인의 입술처럼 나를 설레게 한다. 눈을 감으면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를 일으켜 세울 것 같은 바람이 내 몸속 어딘가에서 나를 읽어 내리고 있는 신경 줄들을 타고 금방이라도 내 보드라운 감성에 불을 질러댈 것만 같은 시간, 커피 한잔을 마시기 위해 아래층으로 내려가 혼자 마실 차 한잔분량의 물을 앙증맞은 연분홍색 주전자에 담아 기적소리가 들리기만을 기다렸다. 물이 끓어 주전자에서 기적소리를 내는데 필요한 시간은 채 3분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꿈속을 거니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며 천천히 기억의 숲에 더듬이를 내밀었다. 딱히 기억이라고 할 것까지도 없는 어제를... 정말이지 어제는 기분 좋을 만큼 상쾌한 봄 날씨였다. 불과 이십 몇 시간 전, 나는 그 누군가와의 전화통화에서 꿈처럼 쏟아지는 햇빛을 바라보면서 좋아죽겠다는 시늉을 했었던 것 같다. 사랑하고 싶다는 표현도 빠트리지 않고 했던 것 같고 이런 날 내 감성의 위험수위가 어디까지 치솟는지 확인하고 싶다고도 했었던 것 같다.
날씨가 너무 좋아 혼자 속에서 바람났다고 말하는 내게 철들면 세상 살기 힘드니 너라도 철들지 말고 곱게 살아 라는 말을 한 친구 J는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내 안에서 솟구치는 생각들을 뒷말이 날까 염려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친구 중에 속한다. 그런 그녀가 어제는 부럽다는 말과 함께 생활이 안정되고 여유가 있어서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했지만 사실 나는 내 이런 철들지 않는 감성은 그런 것과는 별 연관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그날 미치도록 감미로운 날씨 때문에 잠시잠깐 내 속에서 불같이 일어서는 마음을 주체할 길 없어 생각 속에서 수십 가지 그림을 그려내느라 마음한구석 바삐 움직였지만 끝내 내 행동반경은 오후 세시의 바람이 잠잠해질 때까지 우리 집 담을 넘어가지 못하고 지난달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보았던 뮤지컬 맘마미아(MAMMA MIA)의 원곡을 집안이 떠들썩하도록 볼륨을 키워놓고 속에서 일렁이는 뜨거움을 집안 구석구석 숨어있는 먼지와 함께 날려버렸다.
비록 현실과 이성이라는 견고한 갑옷에 쌓여 생각 속에서 이루어지고 생각 속에서 끝맺음하는 감성일지라도 이 뜨거움을 나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살면서 이런 뜨거움은 나라는 여자의 존재를 스스로 가슴 벅차도록 느끼게 하는 에너지가 됨은 물론이거니와 삶의 배경이 되는 풍경들을 있는 그대로의 깊이로 사랑하게 하는 힘이 되기에 오후 세시를 일컬어 이야기하는 몇 몇 사람들의 말처럼 무료하다거나 무표정하다는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내 하루 중 이 시간만큼 나를 자유롭게 하는 시간도 드물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견고하기 그지없는 내 일상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지극히 한순간 감성적으로 돌아설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거울 것인가를... 하여, 나는 혼자 있는 오후 세시를 가리켜 ‘재즈처럼 감미롭고 섹소폰처럼 황홀한’ 느낌이 살아 숨 쉬는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별 주저함이 없다.
종종 나는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정직하게 만드는 내 보드라운 감성이 동갑내기 남편에게 스며들기를 바라며 삶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 될 양념인양 나만의 언어와 몸짓으로 거침없는 생각과 행동을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극히 보수적인 그 사람에게 내 벌거벗은 영혼을 얼마만큼 들키며 살았는지 나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지만 분명한 건 부부라는 이름으로 십 수 년을 살면서 그가 본 내 모습이 온전한 나를 읽어 내리기에는 뭔가 1% 부족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도 그의 이름 앞에 부쳐진 모습들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한다거나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젯밤 부부라는 이름의 우리는 행복했다. 느닷없이 찾아든 몸살처럼 황홀한 봄 날씨라는 마법에 걸린 내 보드라운 감성이 살포시 남편에게까지 닿아 즐겨 마시는 커피향기처럼 오래도록 여운이 남는 허기지지 않는 사랑을 했기에......
2005년 03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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