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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깊고 낮은 읊조림(일백 스물) - 이희숙

by 시인촌 2009. 5. 20.

사람마다 행복을 생각하고 느끼는 모습은 다르겠지만

내 행복의 출발점도 마침표를 찍는 지점도 가족이다.

가족은 나를 지탱하는 든든한 울타리며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는 나무와도 같다.

그래서 행복을 이야기 할 때 가족과 함께 하는 삶을 자연스럽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루 세끼 매끼니 때마다 따스한 밥을 짓고 매번은 아니지만 종류가 다른 찌개와 국을 함께 올리고

바쁜 아침시간에도 육류와 생선, 부침종류를 만드느라 주방에서 보내는 시간이 여느 주부들보다 더 긴 내게

요즘 세상에 누가 그러냐고 딴 세상사람 보듯 말하는 이도 있고

한꺼번에 밥을 지으면 되지 부지런한 것도 팔자라며 심지어 병이라는 이도 있다.

이들 중 몇은 약속을 정하지 않으면 차 한 잔 나눌 시간도 불시에 만드는 법이 좀체 없는 나에게

그 놈의 밥이 언제나 문제라며 누구는 자식 없고 남편 없냐는 쓴 소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부끄러움도 느끼지 못한 채 자기 집은 원래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며

자랑인 양 떠들어대는 이들을 보면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힌다.

세상에나, 원래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니...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들의 배우자와 자식들의 얼굴이 떠올라

괜스레 안쓰럽고 염려된다는 걸, 더하여 씁쓸하기까지 하다는 걸...

 

지인들 중 아침밥을 먹지 않는다는 이들이 어쩌다 우리 집에서 묵을 일이 생기면

예외 없이 정성껏 차려 놓은 식탁에 앉아 아주 맛나게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불편한 심기 드러내며 아침밥 못 얻어먹는다고 죽지는 않아...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죽지는 않지만 누구라도 아내에게 엄마에게 대접받고 싶고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은 있을 것이다.

가족들을 생각하며 정성껏 만들어 내는 음식 속에는 사랑도, 기다림도, 격려도, 믿음도 함께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만드는 이도 먹는 이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음식을 만드는 일이든 소소한 집안일이든 간에 내 할일 이라고 인정하고 시작하는 일은 즐겁다.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주위의 시각은 한마디로 "대충해. 늙으면 골병들어..." 이다.

충고를 들을 땐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해야 할 일이 보이면 줄일 생각은커녕 끝을 보는 성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주방에서, 집안일에서 자유로운 나를 꿈꾼다.

그런 이유가 나 자신을 가꾸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나는 돈 한 푼 벌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바쁘다.

 

깊은 밤 잠들기 전 켜 놓은 라디오에서 자주 듣는 멘트가

요즘 들어 부쩍 나를 설레게 한다.

당신은 70이 되어서도 자신을 가꿀 줄 아는 할머니가 될 수 있습니까?

당신은 70이 되어서도 아내의 손을 잡고 산책을 할 수 있습니까?

당신은 70이 되어서도 꽃집 앞을 지나치지 않고

꽃 한 다발 살 수 있는 여유를 지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까?

 

이 글을 쓰는 2009년 5월 20일 만으로 마흔 다섯이니까

일흔이 되려면 아득히 먼 이야기지만 2000년 이후 지금까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만들어 낸 여유는 제법 많다.

그림그리기, 영어회화공부, 헬스, 요가, 수영 그리고 가끔 마시지 숍에 가서 얼굴과 몸을 맡기고

틈틈이 글 쓰고 여행도 하고 친구 만나고 영화, 뮤지컬, 음악회 등 각종공연장과 전시회장 찾기...

아무튼 심심할 틈이 없었다.

덕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슬그머니 찾아든다는 우울증, 만난 적이 없다.

 

 

 

 

 

 

지난 주 토요일(5월 16일) 글벗문학제에서 시낭송하는 모습의 사진을 보며

다짐하듯 속삭인다.

이희숙, 잘 하고 있어.

넌 누가 뭐래도 행복을 경영할 줄 아는 여자야.

그러니까 지금처럼 살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