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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간이역

추억 굽기

by 시인촌 2024. 11. 20.

 

1

부모님이 떠나고 없는 고향에

어린 시절 살았던 바로 옆집을 산 홍자

놀다 오자고 전화가 왔다

“찜질방이 따로 없다. 옛날 얘기하면서 놀자"

일이 있어서 못 갈 것 같다고 하자

금자가 전화 와서

“군불 땐 방에 몸 지지고 오자. 진짜 좋더라”

 

가로등 불빛 없는 시월 하순의 시골길 사방이 깜깜하다

합천 읍내로 들어가기 전

금양에서 거창, 해인사 방면으로 접어들자

도로 위엔 내가 비춘 상향등 불빛만 환하고

마을엔 개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꽃게 된장찌개와 나물 반찬으로 늦은 저녁을 먹고

절여서 헹군 물기 뺀 열무에

배 세 개와 밥을 갈아 넣고 갖은양념 버무려

세 통에 나누어 담으니 자정이 지났다

 

2

맥주 한 잔으로 고단했던 하루를 털어내고

군불 땐 방에 여자 셋이 누웠다

집주인 홍자는 아랫목에 곰처럼 이불 덮고 

금자는 덥다며 방문 열고 문 앞에 눕고

찬바람에 감기 들까  나는 거꾸로 누워

어린 시절 추억을 꺼내 도란거렸다

먼저 잠이 든 금자 코 고는 소리에

잠 못 든 홍자는 옆방으로 피신하고

나는 날밤을 샜다

 

3

아침에 산책으로 싸게 나왔다는 땅 보러 갔다

열여덟아홉 이후 가본 적 없는 곳

아버지 생전에 계실 때 그 주변은 우리 집 소유의 논이 많았다

추어탕을 좋아하던 아버지는 친환경 농법으로

벼가 자라는 논에 고둥이나 미꾸라지를 넣어 길렀고

음식 솜씨 좋은 엄마가 끓여 준 추어탕은

어린 내 입맛에도 잘 맞아 좋아했다

 

매물로 나온 땅은 나무와 잡초로 우거져

결국 땅 사는 일은 없던 일이 되고

벌개미취 쑥부쟁이 구절초가 만발한 그곳에서

사진 찍고 추억 쌓기에 들떠 나이도 잊었다

 

4

이웃에 사는 할머니가 밤을 주신다

지난 오월에도 된장 간장 참기름 상추를 주셨는데

할머니 정이 겨울 화롯불처럼 따스하다

안 받겠다며 손사래 치는 손에 용돈을 쥐어주니

“어려울 때 자네 엄마를 엄마처럼 의지하며 살았어”

“내겐 평생 은인이다”

엄마를 만난 듯 너무 좋아서 안아드렸더니

다음에 오면 더 많이 챙겨 주겠다고 하신다

 

셋이 함께라서 좋다는 홍자와 금자가 있어서

더 즐겁고 마음 따뜻했던 시간

이것저것 챙겨 주는 두 친구에게

농담으로 엄마 하라고 했더니

홍자 “엄마는 디다 힘들다”

“언제라도 등 지지고 싶으면 말해 같이 오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핑크뮬리가 아름다운 신소양체육공원에 들러

그날 우리 셋이 그곳에 있었다는 존재 증명을 사진으로 남겼다

 

친구들과의 추억 굽기에 아버지도 만나고 엄마도 만난

선물 같은 시간이 달다

살면서 마음에 허기가 지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지냈던 하룻밤이 생각나

“친구야, 군불 땐 방에 등 지지러 가자” 할지도 모를 일이다

 

 

 

2024년 10월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