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가 말했다. 아카시(일명 아카시아나무) 나무아래 가지 말라고,
처음에는 영문을 모른 채 이상한 눈빛으로 말하는 낯선 이를 훔쳐보았다.
그 순간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턱 선이 날카롭고 눈매가 부드러워 보이는 낯선 이에게서 아주 익숙한 바람의 노래가
잔잔한 선율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보랏빛 꽃이 조롱조롱 열린 오동나무를 연상했다.
몸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 그에게서는 자연이 빚어내는 신비한 음률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들리는 듯 했다.
그는 분명 신선의 나라에서 죄를 짓고 내려온 바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오래 전, 햇살과 바람이 찰랑대는 강가에 앉아 두발 담그면
지나가던 바람이 내 등 골짜기를 지나 머리카락 몇 올로 그네를 타다가 이마와 두 볼을 거쳐
장난기 어린 시선으로 내 작고 귀여운 입술에 살포시 내려앉던 기억이
처음 보는 낯선 이의 두 눈에 어린 눈물에 투영되어 떠오르는 순간
두 눈도 멀고 두 귀도 멀고 입도 봉해지는 백치가 되어버렸다.
누군가를 첫 눈에 알아본다는 것,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하거나 흘러가는 구름을 잠시 쉬어가라고 청하는 것과 같이 환상일지도 모른다.
첫 만남, 첫 느낌, 첫 사랑 등... 운명은 늘 처음이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이기를 원하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가끔 아주 가끔은 뜨거운 불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내가 쓴 소설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와 만날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소설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아직도 사랑이라든지 운명이라든지 하는 말에 은밀히 들뜨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누군가와 그 어떤 만남을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삶이라는 커다란 우주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사랑이라는 보드라운 설렘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결혼한 여자는 선뜻 그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견해 차이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생각의 자유를 어느 지점에서 묶어버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함이 더 쉽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여전히 사랑에 관한 시를 쓸 것이다.
이유는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귀한 것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내가 누구의 아내이며 엄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하루 중 잠깐 동안에 일어나는 변화지만 그 순간은 오로지 나만 존재하고 나만 느끼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내 이름에 아주 익숙하다.
그 익숙한 감성은 동갑내기 남편에게까지 욕심을 부리고 싶어 한다.
나라는 존재가 언제까지나 첫 만남 그 느낌처럼 설렘으로 가득하기를, 그리하여 함께 있어도 늘 그리운 사람이기를 원한다.
내가 꿈꾸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사랑느낌은 어쩌면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꿈을 꾼다.
내 사랑이, 그리움이 날마다 한 폭의 수채화처럼 잔잔한 행복이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매일 수채화 같은 사랑을 소망한다. 비록 소설 속에 나오는 환상 같은 것일지라도.
2001년 05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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