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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읊조림(예순 아홉) - 이희숙

by 시인촌 2005. 8. 26.

오늘처럼 바람 부는 날에는
친숙한 나를 뒤로하고 
낯설어서 더 사랑스러운 나를 만나고 싶다.
늘 걷던 거리를 돌아서 걸어도 보고싶고 
즐겨 마시던 향 좋은 커피보다 
연출한 듯 빛깔과 향기가 
사람의 눈을 사로잡고 마음까지 적신다는 
레드와인(Red Wine)을 마시고 싶다.
자주 듣던 음악은 제쳐두고
별 감흥 없이 지나쳤던 음악일지라도 
특별히 가사가 마음에 들거나 
들을수록 가슴에 와 닿는 곡이 있다면 
조목조목 가사를 떠올리며 듣고도 싶다.
그런 이유로 오늘 나는 
존 레넌 작사/비틀즈 노래인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듣는다.
노래가사에 나오는 모습대로 와인을 홀짝일 준비를 하며...

천천히 입안을 헹구듯 굴리며 마시는 와인이
차라리 관능적이기까지 하다는 평을 듣는
프랑스산 샤또 지스끄루 96이면 더 좋겠지만 
아쉽게도 지금 집에 있는 와인은 
같은 프랑스산이지만 한 등급 낮은 와인밖에 없다.  
오늘은 무엇을 위해 건배를 할까
금방이라도 나를 삼켜 버릴 것만 같은 
저리도록 황홀한 욕망을 위해 건배를 할까 
누구도 판독할 수 없는 그리움을 위해 건배를 들까
이도 저도 아니면 
나를 둘러싼 배경 속에서 조화롭게 살아가는 
기특한 내 자신을 위해 축배를 들까
텅 빈 집안에 울려 퍼지는 음악은 중독과도 같다.
그 중독에 자연스레 포로가 된 나는 가만히 있는데 
6인용 식탁에 그림처럼 놓여진 와인 잔이 
저 혼자 찰랑찰랑 건배를 든다. 
문득,
목이 마르다.
집착 아닌 집중할 수 있는 간절함을 위하여
건배를 들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