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賢母良妻)가 되는 게 꿈인 적이 있었다. 한 남자를 만나면서. 아니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그런데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햇수를 더하면 더할수록 현모양처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알게 되었다. 인간의 성장에서 환경의 중요성을 강조한 맹모삼천지교 [ 孟母三遷之敎 ]... 맹자의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세 번 이사했다는. 고금에 현모양처의 으뜸으로 꼽히게 된 맹자의 어머니와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에 버금 될 정도는 아니어도 나름의 원칙과 소신 있게 잘할 수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아이들 나이에 나이테 하나를 더 새겨 넣을 때마다 높아져만 가는 꿈처럼 현모양처라는 이름은 내게 더 많은 걸 요구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느낄 수 있는 정성과 사랑, 인내와 지혜. 더불어 투자라는 범위로까지 확대할 수 있는 시간과 돈.
누군가 내게 살아가면서 가장 어렵고도 힘들지만 죽는 그날까지 놓지 못할 게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함 없이 현모양처라는 이름이라고 답할 것이다. 내 대답에 누군가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볼지도 모른다. 그렇다 해도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몇 년 전까지 경제라는 언저리에서 한 사람의 역할을 담당했든 적이 있든 나는 돈을 버는 것보다 현모양처가 되는 길이 더 어렵고도 힘들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물론 여자니까 그런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사람도 있겠지만 남자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바꾸어 말하면 남편으로 해야 할 역할과 아버지로서 해야 할 역할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옛말에「수신제가 치국평천하(修身齊家 治國平天下)」라는 말이 있다. 짧게 요약하자면 가족이 편안해야 밖에서의 모든 일을 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가정과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람을 팔불출이라고 하여 은근히 못난이로 비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관습처럼 굳어진 생각들이 얼마나 잘못되어 왔는가를 알면서도 그러한 흐름을 당당히 무시하지 못한 나 역시 언젠가 가족이야기를 할 때 "팔불출 엄마의 독백"이라는 제목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골짜기를 들여다보면 가족 이야기를 할 때 왠지 쑥스럽다는 생각이 마음에 흔적처럼 남아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개인의 삶을 어떻게 바로 세우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잘못 이해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결과는 첨단산업이 물결치는 21세기에 와서도 쉬 버리지 못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나는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는 말이 먼저 자신과 가정을 돌보고 난 다음에 나라와 천하가 있다는. 이 절묘한 말 앞에서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의 바른 생각과 바른 행동이 한집안을 흥하게 하고 더 나아가 밝고 명랑한 사회 속에서 이상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이즈음 되고 보면 왜 내 꿈이 현모양처인지에 대해서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글을 읽는 이 중에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이도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아직도 여전히 아니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잔기침 소리처럼 끊이지를 않고 수다스럽게 내 귀에 들린다. 그들 중 어떤 이는 내게 귓속말로 소곤거린다. 사랑하는 일과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일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렵고도 힘들다고. 한술 더 떠 당신이 사랑이 뭔지 알기나 하냐고. 또한, 절망의 바다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오래도록 방황해 본 적이 있느냐고. 그 말 앞에서 나는 일단 정지신호 앞에서 차를 멈추어야 하는 것처럼 호흡을 길게 하고는 잔잔하지만 깊은 눈빛의 언어로 말하고 싶은 걸 애써 외면하며 나직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이야기할 준비를 한다.
현모양처가 되는 길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동반해야 하는 자기희생을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하며 함께 사는 가족이라는 이름에게 늘 그 자리에서 한결같은 믿음과 미소로 사랑과 희망이 늘 샘솟을 수 있게 꿈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 세상 어느 사랑보다도 더 강한 사랑이며 죽는 그날까지 결코 멈추어서도 안 되며 끝나지도 않는. 위대한 사랑에 가까이 다가가는 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지나온 시절을 되돌아갈 수는 없어도 지나온 시절은 모두 아름다웠노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새로운 한 주, 새로운 한 달, 새로운 한 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리라. 작년에 내렸던 첫눈이 올해 내리는 첫눈은 아니지만 해마다 다른 설렘으로 그 첫눈은 지상으로 우리 마음속으로 내리듯이 어떤 일에 대한 각오도 어떤 사람에 대한 설렘도 어쩌면 모두 한결같이 첫사랑, 첫눈, 첫 느낌 같은 마음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매 순간 우리가 숨 쉬고 느끼는 이 시간은 다시 되돌리기나 늘리기가 되지 않는 딱 한 번뿐인 기회이므로 나는 소박하지만, 결코 작지 않은 현모양처(賢母養妻)라는 꿈에 더 가까이 접속하기 위해서 2004년 갑신년에도 여전히 즐거이 내 시간과 정성을 투자하리라. 뭔가 새로운 각오로 새로운 다짐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은 이 얼마나 황홀하고도 생기 넘치는 살아있는 축복인가 말이다.
2003년 12월 24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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