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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변신을 꿈꾸는 여자와 안주하고픈 여자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1. 25.

나는 가끔 내 안에서 ‘변신을 꿈꾸는 여자와 안주하고픈 여자’ 사이에서 짧지만 아주 강렬한 충돌을 경험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충돌은 파스칼이 말한 인간의 모든 불행은 단 한 가지, 휴식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데서 온다는 말과 어느 정도 맥락을 같이하지만 나 자신을 위한 온전한 휴식을 할 수 없음에 대한 인식과 맞물려 솟구치는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삶의 방법론과 내 자신의 존재론적인 이유를 찾는 과정에서 오는 충돌이 어찌 보면 더 크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이러한 충돌이 매순간 내 삶을 끓어오르게 하는 건 아니지만 휴식 할 수 없음에 대한 안타까움이 내 정신과 육체가 견뎌낼 수 있는 정도를 벗어났다고 판단되면 고요했던 내 마음은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이 몰아치는 소용돌이 속으로 휩싸여 이게 아닌데 하는 조바심마저 일으키게 하지만 그 충돌의 폭이 미세할 정도의 떨림일 때는 오히려 교과서적인 내 삶을 한 번 더 관찰자적인 입장에서 바라보게 하는 냉정함도 스스로 터득해 가는 이로운 방향도 없지 않아 무엇을 버려야하고 무엇을 택해야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 중이고 앞으로도 이런 고민은 계속 될 것이다. 어쩌면 내 삶이 끝나는 그 문턱에서조차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고민하지 않는 삶은 죽은 삶과 같으며 고민해야 할 뭔가가 있을 때 한 사람의 삶의 방식은 더 적극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


어느 날 문득 계절병처럼 찾아드는 변신을 꿈꾸는 여자와 안주하고픈 여자 사이에서 ‘산다는 건 뭘까? 혹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산 삶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까?’ 하는 열병에 휩싸이게 될 때 무엇보다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것은 내 자신의 존재론적인 이유를 찾고자 하는 과정에서 여기저기 하나 둘 복병처럼 불거져 나오는 것들로 인해 내 목소리와 빛깔이 점점 작아지고 엷어만 간다는 점이다.


나를 둘러싼 이러한 환경은 마치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보수와 개방사이에서 대립하는 두개의 큰 물결을 보는 것과 같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명쾌하게 나를 드러낼 수 없게 한 원인과 어느 정도의 마찰을 각오하고서라도 더 나은 이라는 단서를 부치며 은근히 변화를 기대하고 부추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다는 이유를 내세워 변화를 두려워하는 안주사이에서 머뭇거리기도 한다.


보수와 개방이라는 말은 정치와 문화, 사회전반에 걸친 충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마음 안에도 늘 보수와 개방이라는 두개의 논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팽팽한 긴장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언제부터인가 들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그 이전보다 훨씬 더 또렷하게 금 그어지듯 마음에 부딪치는 걸 보면 아마도 결혼생활 13년 동안 내 이름을 드러내기보다 나를 낮추어야 하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았고 앞으로도 쉬 바뀌어 질 것 같지 않다는데서 오는 내적 충돌이 한몫을 하지 않나 싶다.


세상에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과 변화를 기회로 삼는 사람으로 나눈다면 나는 분명 변화를 원하는 쪽에 기꺼이 서겠다는 진보적인 성향의 사람에 가깝지만 실제생활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움직여 보려고 내 주장을 더 많이 나타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그렇게 나 자신을 드러내서도 안 되는 상황들이 더 많았다. 이런 상황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나보다는 다른 사람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양보 내지는 이해심 더 나아가 협동심을 길러주기도 했지만 그 다른 이면에는 내 자신의 잠재력을 한없이 잠재워야 하는 용기를 필요로 했다.


이즈음에서 분명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의 많은 부분이 보수와 개방이라는 두 물결 사이에서 늘 좌충우돌하면서 산다는 뜻은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불현듯 솟구치는 욕망의 소리가 내 정신을 지배하려고 할 때 마치 곡예사가 당겨진 줄 위에서 중심을 잘 잡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과 아직은 나를 잠재워야 할 때라는 인식 사이에서 간간이 그네를 뛰는 마음을 다스리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을 뿐.


그동안 내 삶을 이끌어 왔던 많은 부분들, 즉 남편과 두 아이 더 나아가 맏며느리로서의 삶에 대부분 맞추려고 노력했던 부분들이 사랑이라는 밑바탕 위에서 책임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한 당연한 결과라고 해도 불혹의 나이에 나이테 하나를 더 보탠 지금부터라도 결혼 13년 차 주부로 살아오는 동안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한 부분들을 뒤로 미루거나 혹은 나를 낮추는 자세를 취해 평온해졌던 것들로부터 이제는 조금씩 변화시켜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 삶을 움직이게 하는 가까운 사람들 중 단 한 명도 기존에 행했던 그대로 안주해주기를 바라지 나 자신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황이 이쯤 되고 보면 변신을 꿈꾸는 여자와 안주하고픈 여자 사이에서 나는 충돌 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충돌은 언젠가 학원 강사 초빙 제의를 받았을 때 엄마로서 자식을 잘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 아래 아이 라는 울타리를 넘지 못해 직업을 가질 기회를 놓쳐 버렸고 몇 해 전, 지금처럼 시인이라는 이름을 달기 전인 어느 해 가을, 내 이름 앞에 시인이라는 이름과 수필가라는 이름을 덤으로 달아주겠다는 제의와 지난 달 소설가라는 꼬리표를 달아주겠다는 추천 등단 제의 역시 남편이라는 담을 넘지 못했다. 물론 남편이라는 거대한 벽 때문에 내 어릴 적 꿈인 내 이름이 많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수 있기를 희망한 그 마음에 한 단계 더 가까이 다가 갈 수 있는 기회를 버린 건 아니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간직한 계획이 있었기에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말로 내 이름을 여기저기 알려서 키워주겠다는 제의를 별 동요 없이 뿌리 칠 수 있었지만 내가 거부하는 것과 누군가에 의해 내 선택의 폭을 좁게 하는 데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으므로 지난 7월 남편과 한바탕 열변을 토해야만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나는 아직도 조선시대 여자처럼 안으로 나를 낮추어야만 편해지는 것들과 나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욕망 사이에서 자주 고민한다. 나를 자주 생각의 늪에 빠지게 하는 이러한 것들은 오랜 시간 내 안에서 익을 대로 익어서 어떤 날은 오히려 익숙해진 편안함 같은 걸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렇게 익숙해진 것들이 편하다고 생각되는 날은 마음은 한없이 맑고 고요해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나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만 어느 날 불쑥 그 마음의 평화가 깨어지는 날이면 기울기 시작한 저울의 눈금처럼 내 마음은 끝없이 어디론가 초점을 맞추어 비상하고 싶어 한다.


이러한 나를 어느 정도 읽어 내리는 짝꿍(남편)은 나라는 사람이 기존에 존중되었던 것들로부터 차츰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경계의 충고를 잊지 않는다. 그러한 충고는 내 안에서 일어나는 파도를 얼마 동안 잠재울 약이 되기도 하지만 나 역시 욕심이 있는 사람인지라 내가 하고픈 내가 움직이고픈 삶의 방식을 짝꿍이 별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을 범위 내에서 서서히 내 생각을 하나 둘 흘린다. 뭐랄까? 중요한 어떤 일을 벌이기 전에 귀 뜸 정도 해주는 거라고나 할까... 아무튼 나는 종종 내 안에서 요동치는 두개의 생각들로 인해 ‘나는 무엇 때문에 혹은 누구를 위해 사는가?’ 하는 존재론적인 의미에 때때로 홀로 심각하다.


지금의 내 모습이 내가 꿈꾸고 바라던 최상의 모습이고 선택이었는지에 대해서 수시로 반문하는 나를 만나면 나도 별수 없이 이기적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스스로 만든 벽 때문에 억울하다든지 외롭다는 생각은 아니다.  그만큼 언제인가부터 버림으로서 또 다른 나를 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늘 내 삶 중심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신을 안다는 건 나를 잘 통제 할 줄 안다는 오만이기에 앞서 영악할 정도로 이기적인 발상에서 나온 건지도 모른다.


가령, 취하지 못한 것들에 대한 미련보다는 나를 움직이게 하고 웃게 하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내 삶을 의미 있게 하는 것들 즉, 나 자신보다는 가족이라는 울을 더 중요시하는 쪽으로 선택했고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는 뜻이다. 나로 하여금 이런 생각이 들게 하는 것은 생활 곳곳에서 일어난다. 시시때때로 일어나는 보수와 개방의 충돌은 때때로 나를 시험에 들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지만 그런 것들로 인해 내 마음은 더 한층 다양한 물상을 바라보는데 있어서 한가롭기까지 하다. 이런 마음은 곧 느긋함과 연결되어 내가 꿈꾸던 많은 것들이 손짓을 해 와도 쉽게 흔들리지 않을 수 있도록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을 인정하다 보면 자연히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 반듯하리만큼 냉정한 나와 만난다. 나 하나를 잠재우면서 얻어지는 것들이 그 몇 배 아니 몇 십 배의 이상적인 효과로 되돌아올 때 내 선택에 대한 의미를 더 한층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나 자신만 온전히 생각한다면 나는 분명 나를 변화시키는 카멜레온 같은 여자가 되어야하지만 나를 둘러싼 가족과 그 밖의 것들을 생각하면 지금처럼 조용한 삶을 영위해야만 한다. 이런 두 가지 생각 속에서 사는 나는 가슴에 두개의 막을 지니고 사는 것처럼 느껴져 가끔 내 자신에게 화가 날 때도 있다. 특히 기계적인 몸짓만 무수하고 생각을 키우는 여백의 시간을 즐길 만큼 시간이 한가롭지도 마음이 부드럽지도 못할 때 더 더욱.


나는 가끔 내 안에서 ‘변신을 꿈꾸는 여자와 안주하고픈 여자’ 사이에서 짧지만 아주 강렬한 충돌을 경험한다. 결코 포기 할 수 없는 욕망 때문에......



2003년 08월 11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