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과향기

편지( Re: 흐린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by 시인촌 2004. 1. 27.
지난주에 내장산에 다녀왔다는 바람꽃 네 편지를 읽고
잠시 그 날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쓴다.
내 딸 신애가 막 돌(1993년)을 지난 그 해 가을, 서른 한 살의 동갑내기 우리 부부는
10월의 마지막 일요일, 단풍이 곱기로 유명한 내장산에 간다는 그 설렘 하나만으로도
흥분되어 오는 마음을 서로에게 조금씩 들켜가며 내장산을 향해 아침 일찍 출발을 했지.


만13개월이 지난 딸아이가 걷는 걸 좋아해서 가지고 간 유모차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들을 챙긴 작은 가방을 실은 짐차가 되어 버렸지만
비교적 평평하게 뻗어있는 그 길을 따라 내리는 단풍 비를
참으로 맛나게 맞으며 오래도록 걸었어.


절 뒤 모퉁이 한켠에서 장작 패는 스님의 모습이 느릿하지만 참으로 평온해 보여
짝꿍(남편)과 아이가 연못이 있는 아래쪽으로 앞서 내려가고 있는데도 나는 쉬 발길을 옮기지 못했어.
파르라니 깎은 스님의 머리 위로 넘실대던 가을햇살이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어찌나 아름다워 보이던지 몇 발자국 떨어져 바라보는 내 마음까지 그 순간 정지 된 풍경 속을 거니는 느낌이었어.
마치 사람과 자연이 하나가 된 자연스러운 풍경에 나도 모르는 사이 물들어 버린 것 같은...

   
그날, 내장사 안에 있던 연못의 물고기를 보며 좋아라 손뼉 치는 딸아이를 데리고
단풍터널이 환상적으로 펼쳐져 있는 그 곳을 배경으로 수없이 사진을 찍어댔던 기억과
꼬불꼬불한 길을 타고 백양사를 거쳐 고추장의 고장으로 유명한 순창을 지나
남원으로 가서 미리 만나기로 약속한 짝꿍의 친구인 예비신랑과 예비신부를 만나서 좋은 하루를 보냈던...


내게 아름다운 시절의 한 페이지를 다시 넘기게 해 준 서인아,
정말 고맙다.
치열(?)하다 싶을 정도로 바쁘게 살고 있는 내게 있어서
언제부터인가 웹 상으로 편지를 주고받는 다는 게 참으로 드문 일이 되어 버렸어.
그 이전 보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이 확연히 줄어든 탓도 한 몫 하겠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거짓말처럼 그 누군가에게 안부를 묻고 하는 일이 내게 있어 점점 낯설게만 느껴졌어.
그런 느낌이 길어지니까 어떤 달은 한 통의 편지도 쓰지 않게 되더라.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도 예외는 있는 법,
무슨 말이냐고?
내 가족에게만은 여전히 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는 뜻이지.
원고지나 편지지에 직접 내 글씨체로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 편지를...


오늘은 학교 아나운서 시험에 6:1의 경쟁률을 뚫고 당당히 합격한 딸에게 축하와 함께
금요일날 치는 시험 노력한 만큼 정성을 다하라는 편지를 썼고
내일 아침 일어나면 아침밥 하는 동안 잠시 짬을 내어 아들에게도 편지를 쓰려고 해.
가끔은 내 등에 업혀 응석을 부리기도 하고 아직은 엄마가 읽어주는 동화책이 더 재미있다는 아이지만
태권도 할 때의 씩씩한 모습과 생활 속에서 드러나는 여러 가지 행동에서 참 많이 컸구나 싶어
절로 내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지게 하는 아들에게 며칠 전 단풍을 주우면서 단풍이 물드는 이유와
낙엽이 떨어지는 까닭을 엄마인 내가 설명 해 줄 때 두 눈을 반짝이며 끊임없이 질문 공세를 해대던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웠다는 말과 함께 시험 침착하게 치라는...
 

언젠가 네가 나에게 말했지.
"언니, 우리도 좋은 인연 맞죠." 라고...
그 말은 내게 있어서 기쁨인 동시에 너에 대한 깊은 정으로 흘렀어.
내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참으로 따스한 안부,
넌 그렇게 내게 있어 올 한해도 변함없이 좋은 인연으로 가까이 있었어.


모두가 잠든 깊은 밤에 제법 자라 혼자 앉아서 장난감을 집어 들고 쪽쪽 빨고
꼼지락거리며 멜로디도 누르고 자동차에 태워놓으면 곧잘 간다는 서준이와
친정 가서 마당 가득 피어있는 국화 향을 맡고 밤이면 하늘 가득 총총한 별들을 바라보면서
참 행복했다는 너를 떠올리며 감기조심 하라는 네 안부가 무색하리만큼 코감기에 걸려
어제와 오늘 코맹맹이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나의 하루를 돌아다본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되는 나의 시간은 정말 치열할 정도로 짜여 있지만
사는 거 정말 감칠 맛 나도록 흥겹고 고마운 거라면
그 누군가는 나에게 인생의 쓴맛을 몰라서 그런다고 할까?
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살거나 아니면 자신의 삶을
이름 모를 전당포에 맡겨 놓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가며
찾아가기를 포기하고 있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서인아,
오늘은 이 말을 너에게 해주고 싶어.  
행복과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우리에게 주어진 삶 속에서 시간관리(Time Management)와
여가관리(Pastime Management)는 필수조건이라고...



너의 매일 매일이 늘 건강과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면서
새벽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만......
.
.
.


행복을 0순위에 놓고 살아가는 시인촌으로부터.



2003년 11월 06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