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혹의 나이에 붓을 들었다. 그동안 수많은 전시회나 갤러리를 찾아다니며 그림 보는 안목을 키워왔던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보고 느끼는 즐거움과 더불어 내 마음 가는대로 붓을 지배하고픈 마음에 붓을 들었다. 지배한다는 표현이 어찌 보면 욕심일 수도 있겠으나 결코 욕심 때문에 붓을 들고자 한 것은 아니었다. 내 안에서 끓어 넘치는 것들 중 끊어질듯 말듯 가볍게 떨리며 이어지는 메나리조풍의 불규칙한 정서를 하나 둘 버리기 위한 것들이 욕심이라면 몰라도...
붓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실천에 옮기게 된 것은 순전히 내 선택이요, 내 의지에서 빚어진 결과이겠지만 나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을 돌리게 한 건 솔직히 남편의 말 한마디가 큰 효과를 발휘했다. 음식, 음악, 미술 등 장르를 구분하지 않고 우리 것을 좋아하는 남편은 언젠가 내게 대금이나 단소를 배워보라고 권유했으며 또한 사군자와 문인화를 그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진지하게 건 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아예 나를 만능재주꾼으로 만들지 그러냐는 식이었지만 속으로는 몇 년 전 모 대학 평생교육원 컴퓨터 중급강좌 수업을 함께 했던 사람들과 대구 사람들이 앞산이라고 부르는 대덕산과 산성산으로 등산을 갔을 때의 일을 떠올리며 그럴까 하는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정상에 올라 땀을 식히려고 잠시 바위에 앉아있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단소소리가 일행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심금을 울리는 소리는 애틋하다 못해 차라리 구슬프기까지 했는데 그때 시간이 허락되면 단소도 불고 경치 좋은 곳에 앉아 그림도 그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지만 아무튼 나는 세상에 대해 호기심이 많은 사람 중 한사람이다. 내 끝없는 호기심은 나이를 먹어도 지칠 줄 모르고 오히려 세월의 향기 속에서 나를 끓어오르게 하는 것들을 더 적극적인 자세로 행동하게 한다. 하고 싶고 보고 싶고 느끼고 싶은 것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살아있음이 그저 고맙다는 말 실감하고 산다면 그 누군가는 코웃음 칠지도 모르지만 하여간 내 지적호기심은 나를 들뜨게 하고 취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 둘 경험하게 하는, 내게 있어 버릴 수 없는 천연자료와도 같다.
다시 그림 공부를 시작한 이야기를 할까 한다. 그렇게 시작한 내 그림 공부는 화려한 서양화는 쉬 싫증나기 쉽다는 남편의 조언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마음속에 아름다운 여백의 공간하나를 제대로 장만하려면 사군자와 문인화를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 유화 대신 먹을 선택했다. 먹을 갈 때는 너무 힘을 주어서도 안 되며 천천히 가볍게 둥글게 가는 것이 본령인데 가끔은 그 사실을 잊고 나도 모르게 손목에 힘을 주곤 한다. 먹 하나를 갈 때에도 사용법이 있듯이 우리 마음 안에도 지켜야 하는 법이 있지 않을까 싶다. 자칫 서두르다 보면 실수가 잦기 마련이고 너무 느리면 남들보다 늘 한발 뒤쳐 조바심 내는... 그렇게 마음 안에 커다란 우주가 숨 쉬고 있는 그것을 나는 세계라 일컬으며 내 세계에서만큼은 내가 주인이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먹에도 제각기 다른 향기가 있는데 내가 사용하는 먹은 내가 좋아하는 솔 향이다. 스승님은 좋은 먹이니 연습 할 때에는 가격이 싼 먹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지만 나는 웃으면서 초보한테는 향이라도 좋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해 함께 그림 공부하는 사람들을 웃게 했다.
오늘도 직선과 각선을 200개정도 그렸다. 난을 쳤다고 표현하는 그 선을... 아직도 내가 그린 그림은 죽은 선과 금기시해야 할 기교가 눈에 띄게 보이지만 손끝에 마음을 모으고 붓 가는 대로가 아닌 마음 가는 대로 그려질 그 순간을 생각하며 열심히 그리고 또 그렸다. 이런 나를 보고 오늘 선배님 중 한분이 신입생이 도를 닦는다고 힘들겠다는 농담을 했다. 그만큼 붓끝에 마음을 모으고 원하는 대로 그리는 게 어렵다는 뜻이 되겠지만 먹의 농도에 따라 다르게 보여 지고 느껴지는 그림을 볼 때마다 가야 할 길이 참으로 아득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승이신 이 화백님과 그림 공부를 몇 년째 계속 해오고 있는 선배들은 한결 같은 말을 한다. 내 안에 있는 기교와 이론적인 지식을 모두 버리고 다시 無(무)에서 시작하라고.
바쁜 생활 속에서 시간을 나누고 나누어 늦은 밤, 아이들이 잠을 자러 각자 방으로 돌아간 시간, 거실에서 홀로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남편을 뒤로 한 채 3층에 위치한 사색의 방으로 올라가 하루에 한 시간씩 먹을 갈고 그림을 그린다. 내가 원하는 그림을 상상하면서 붓끝에 마음을 모아보지만 늘 마음보다 붓이 먼저 나가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도 하지만 조급함은 금물이기에 언젠가는 내가 잡은 붓에게 휘둘리지 않고 붓을 지배 할 수 있는 그날이 오겠지 하는 기다림의 미학으로 붓을 든다.
2004년 01월 08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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