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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커피는 내 인생의 축소판이다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2. 4.

누군가 내게 집착에 가까운 습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주저 없이 그렇다 이다. 습관이란 건 하나의 생각이 고착된 동일한 행동으로 표출되어 드러나는 것이겠지만 나를 둘러싼 습관들은 내가 좋아서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기에 애써 고치려하지 않는다. 가령, 365일 매일같이 잠들기 전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는 것과 샤워를 해야 하는 것, 이른 아침 하루일과를 시작하기 전 거울 앞에 앉아 한참을 말없이 거울 속 나를 응시하는 것, 식사 후에 반드시 커피를 마셔야 하는 일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그냥 대수롭게 고착된 것들이 아니라 내게 있어서는 나를 깨어있게 하고 맑게 하는 의식 같은 것이다.

 

주어진 삶의 꽃밭을 부지런히 가꾼 후 잠이라는 휴식의 문을 열고 들어가기 전 머리를 곱게 빗어 내리는 건 하루를 정갈하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뜻이고 샤워를 즐겨하는 이유는 이런저런 이유로 걸러내지 못한 생각들을 흐르는 물에 땀과 함께 말끔하게 씻어 내리면 몸과 마음에 건강한 새로운 에너지가 절로 솟아나는 것 같은 좋은 느낌이 들어서이고 이른 아침 일어나 제일 먼저 하는 거울 속 나를 응시하는 것은 하루를 시작하는 경건한 마음을 새롭게 채워가겠다는 무언의 약속이고 식사 후에 반드시 커피를 마셔야 하는 습관은 곧바로 양치질할 상황이 아닐 때 텁텁해진 입안을 조금은 향기롭게 하기 위함도 있지만 커피 한잔을 마시면서 느끼는 여유를 즐기기 위함이다.

 

커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내가 커피에 관한 단상Ⅰ에서 어떤 커피를 고집하기보다는 그날 내 느낌과 마주한 사람에 따라서 달라진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나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은 한 가지 커피 맛도 진정 모르면서 커피와 인생, 사랑을 논한다고 은근슬쩍 일침을 놓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군가 내게 참 인생을 참 사랑을 아느냐고 묻는다면 내 인생의 중심을 나로부터 출발해서 주변까지 밝게 비추는 사람이 될 수 있게 열심히 노력은 하며 산다고 말하고 싶다. 견디며 살아내야 하는 인생, 그 오묘한 진리를 하나둘 몸으로 마음으로 터득해가는 과정이 결국 삶이고 보면 어떤 사물 어떤 대상을 좋아하는 나름의 이유가 사회적인 관념에 위배된다든지 타인을 불편하게 하는 게 아니라면 모범답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없는 무형의 생각과 마음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와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이유는 없을 듯싶다.

 

내가 어떤 커피를 즐겨 마신다든지 혹은 어떤 커피가 아니면 마시고 싶지 않다는 식으로 꼭 고집하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기호식품으로서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이유에서이고 어떤 커피든 다 마신다는 이야기는 세상을 살면서 좀 더 둥글어지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고 표현한다면 내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면서 그래도 굳이 좋아하는 혹은 즐겨 마시는 커피를 한 가지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진한 블랙커피를 좋아하고 즐겨 마시는 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블랙커피는 쓴맛이 강하면 강할수록 그 여운은 길다는 말이 있듯이 뒷맛이 써서 오히려 구수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블랙커피를 마실 때의 첫맛과 끝 맛의 느낌이 고진감래(苦盡甘來)라고 하는 고사성어(故事成語)와 비슷한 느낌이 들어 기호식품인 커피 한잔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내 특이한 취향 때문에 즐겨 마신다.

 

나는 종종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내 사랑이 뜨겁지만 아프지 않고 진하지만 향기로운 커피처럼 부드럽고 달콤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각하는 것은 돈 한 푼 들지 않고도 즐거울 수 있는 여유이기에 누구에게도 방해받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생각의 집을 마음속에 지어 그 속에서 깊고 너른 인생의 바다를 넘나들며 사랑과 철학을 이야기한다. 내가 마시는 커피취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그날 기분에 따라서 혹은 마주한 사람에 따라서 달라지는 커피를 즐겨 마시는, 그렇다고 해서 나라는 사람이 삶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정립되지 않아 기분에 따라 변덕을 부릴 만큼 나약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하루에도 몇 잔씩 마셔대는 커피도 상황에 따라서 스치는 느낌과 풍경을 조미료처럼 첨가하고 싶다는 생각뿐......

 

즐겨 마시는 커피 중 가장 맛있는 커피는 식사 후 남편과 마시는 대화가 있는 커피가 단연 으뜸이다. 그 안에는 사랑하는 두 아이의 이야기와 부모님 이야기, 더 나아가 우리 부부가 살아가며 바라보는 사회전반에 걸친 이야기 등이 사랑과 이해라는 이름으로 잘 녹아있기 때문이다. 삶을 배경으로 한 대화가 있고 그리운 풍경이 있는 커피 한잔의 여유, 그 느낌이 너무도 좋아 하루에도 몇 잔씩 커피를 마신다. 커피는 내게 있어서 살아가는 배경 중 가장 향기로운 향수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면 누군가 또 고개를 갸우뚱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런 내 생각이 그 누군가에게 다 이해되지 않는다 해도 내 안에 집짓고 사는 생각이란 샘물은 커피 한잔이 주는 여유가 사랑과 희망이 적절히 배합된 삶의 원천 중 빠트리고 싶지 않은 것 중 하나라고 의미를 부여하며 조용히 솟구치는데......

 

삶이란 커피, 크림, 설탕을 각자 좋아하는 기호에 따라 넣어 마시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사랑하고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한사람의 삶이 고통일 수도 행복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오늘도 이른 새벽부터 조용하지만 부지런하고 진하지만 아프지 않는 내 정성을 노력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투자를 한다. 거부할 수 없는 삶의 애착을 느끼며......

 

커피를 유난히 좋아하는 내게 있어 커피도 내 인생의 축소판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다.

 

 

 

 

2003년 05월 20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