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몇 마디의 인사를 나누고 난 뒤
십 중 팔 구는 나에게 직장이 어디냐고 묻는다.
"직장...요 행복한 우리 집이죠." 라고 대답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절반이 넘는 사람들은 내가 농담하는 줄 알고
정색을 하고 다시 묻는다.
"무슨 일 하세요?"
재차 묻는 물음에 얼른 대답을 하지 않으면 많은 사람들은
처음 내게서 느낀 첫인상을 떠올리며 추리하듯 다양한 말들을 쏟아놓는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공무원이 직업일거라는 말인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 순간의 기분은 좋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마냥 좋아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왜냐하면 내 모습에서 어떤 일이든 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는 건
전업주부로 사는 여성들에게서 흔히 엿볼 수 있는 느슨함을
쉽사리 발견하지 못했다는 뜻이기에 기분이 좋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첫인상이 너무 까다롭게 비춰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요즘 들어 부쩍 직장이 어디냐는 말과 함께 명함을 달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언젠가 남편이 명함을 새로 만들 때, 나도 명함을 만들어볼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데
명함 속에 넣고 싶은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해 여태까지 내 이름 석자가 또렷이 새겨진
명함 한 장 건 낼 수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누구는 이런 나에게 명함 만드는 것이 뭐가 어려워서 그러냐고 하지만
명함 한 장으로 나를 상대방에게 설명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만들지 않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지금껏 변함이 없다.
그 누군가 이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면 별난 사람 여기도 있네 싶겠지만
솔직히 많은 사람들이 건 내는 명함처럼 이름 아래 소속된 직장 직함과 전화번호
그밖에 개인 휴대전화 등이 표시된 평범한 명함에는 별 관심이 없다.
며칠 전, 어떤 모임에 갔다가 몇 몇 분들이 자신의 명함을 건 내며
내 명함 한 장을 달라고 했지만 명함이 없는 나로서는 명함이 없다는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 말을 들은 몇 몇 사람들은 아주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날 이후 한동안 잊고 있었던 스스로를 관찰하는 습관이 슬며시 되살아났다.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 라는 기본적인 의문부호를 시작으로
나는 무엇 때문에 사는가? 라는 명제에 이르기까지 내 질문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작은 종이에 나를 설명할 수 있는 맞춤식 문구를 찾는다는 것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날 며칠 즐거운 고민 끝에
나 자신을 타인에게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로
‘행복을 경영할 줄 아는 여자’ 라는 문구를 기억해냈다.
아니, 선택했다고 해야 더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언제까지나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말로
‘행복을 경영할 줄 아는 여자’를 떠올릴지는 알 수 없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나라는 여자는 어제도 행복했고
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 수많은 날들도 행복했고 오늘 하루도 행복했으므로
지금 이 순간은 누가 뭐라고 해도 나 자신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로
‘행복을 경영할 줄 아는 여자’만큼 잘 어울리는 말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행복을 경영할 줄 아는 여자’ 라는 불과 몇 음절 되지 않는 이 짧은 문구가
마흔을 넘긴 지금의 나를 제대로 설명해줄 것 같은 착각마저 느끼며
내 자신이 나와 나를 둘러싼 배경들을 얼마나 사랑하고 아끼며 믿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온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반응할 정도로 기억해냈다.
먼 옛날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순간이
이보다 더 기뻤을까 하는 생각을 했을 만큼
스스로를 읽어 내린 시간들이 기뻤다.
‘행복을 경영할 줄 아는 여자’ 라는 제목의 글에 마침표를 찍기 전에
이 글을 읽어 내린 나그네들에게 묻고 싶다.
우연이라도 생활 속의 작은 발견을 통해
스스로를 관찰하고 읽어 내리는데 인색하지 않는
정직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서,
있다면 깊어 가는 가을,
여행을 하듯 그대 자신과의 즐거운 데이트를 떠나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명함 한 장으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내 생각을 읽어 내린 누군가는 웃기고 있네 하고 코웃음 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2005년 10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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