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의 출입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곳을 지난 목요일에 다녀왔다. 그곳은 다름 아닌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 제 4사령부가 있는 대구 캠프워크와 캠프핸리다. 일제강점기 때, 대구중학교 건물이 있던 곳이기도 하며 일본 제 48사단이 머물러있던 곳이기도 하다. 나누어준 명찰을 훈장처럼 가슴에 달고 안내자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건물 여기저기를 구경하였는데 작은 미국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이해하면 된다는 곳곳의 시설들이 군사시설 맞나싶을 정도로 자유스럽고 고급스러운 모습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브리핑을 하는 대회실에 있는 모든 의자는 천연양가죽으로 손에 와 닿는 감촉이 보드랍기 그지없고 몇 홀인지 확인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골프시설에 가족 수대로 집 평수를 배정해 준다는 캠프핸리 내에 있는 가정집 모습과 대문 없는 집 앞에 펼쳐진 넓은 잔디 뜰까지...
아무리 직업군인이라지만 한 건물에 그것도 층 구분 없이 남녀 모두 사용하고 있는 숙소는 같은 성별로 두 명씩 룸메이트가 되어 한 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침대 두개는 기본이고 욕실이며 컴퓨터, 텔레비전, 냉장고까지 어지간한 우리나라 호텔수준 못지않았다. 같은 건물 안에 있는 Game Room에는 당구를 칠 수 있는 당구대와 대형 텔레비전, 넓은 소파, 즉석에서 얼음조각들이 와르르 쏟아지는 전자제품, 냉장고, 씽크대, 오븐까지 놀라움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몇 대의 전화기가 놓여있는 휴게실 입구를 지나 내부로 들어서니 인터넷을 할 수 있는 컴퓨터 몇 대가 휴게실을 빙 둘러가며 설치되어 있었고 세탁실에는 여러 대의 세탁기와 건조기까지 설치되어있어 부지런한 사람이면 집에서처럼 매일 옷을 빨아 입을 수도 있어 말이 군 생활이지 생활 속에 필요한 것들이 잘 갖추어져 있어 우리나라처럼 의무국방이 아닌 미국에서는 군인도 직업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도 우리나라 군인들이 생활하는 모습과 너무도 달라 이름도 얼굴도 모르지만 전방, 후방 할 것 없이 밤낮으로 철통같은 경계태세로 맡은바 임무에 충실하고 있을 우리나라 군인들 생각에 괜스레 콧등이 찡해왔다.
점심시간, 캠프워크 내에 있는 식당에서 군인들과 함께 섞여 식사를 했는데 우리가 흔히 미국사람하면 쉬 떠올리는 백인이 많았지만 아프리카 출신이라 여길 만큼 흑인병사와 한국인 군인(카추샤라고 불리는)들도 종종 마주칠 수 있었다. 7살 때 그곳 캠프워크에서 피아노연주대회에 참석했다는 추억의 사진을 보여준, 나보다 10살 아래인 여자분과 함께 앉을 자리를 찾다가 자리가 비어있는 한국군인들 앞에 앉게 되었는데 동석한 군인은 자신의 고향은 서울이며 그곳 카추샤로 와있는 대부분 사람들은 위쪽지방에서 온 이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고향이 서울인 남편이 자연스레 생각났다. 바깥음식을 워낙 싫어하는 탓에 일주일에 평균 5일은 집에서 나와 함께 점심을 먹는 남편이 대한민국 속의 작은 미국을 경험하는 아내의 특별한 외출로 인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바깥음식을 먹었겠구나 생각하니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언젠가 남편으로부터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 병사들에게는 국방부에서 그들의 식사비용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들이 먹는 식사 값이 한끼인지 하루인지 어떤 것이 진실인지 기억이 가물거려 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15,000원이라는 소리에는 군대에서 먹는 식사치고는 꽤나 비싸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있는 그들이 먹는 식단을 보니 그 정도 금액은 별로 비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식판과 나이프, 스푼, 포크를 들고 음식이 놓여있는 곳으로 가니 닭고기와 조리 방법을 달리한 몇 종류의 돼지고기가 제일 먼저 사람들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어 먹기도 전에 냄새에 질려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체험을 언제 또 해볼 수 있을까 싶어 돼지갈비와 강낭콩을 넣은 밥 조금을 받았다. 느끼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김칫국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는데 보기에도 맛없어 보일 정도로 김치만 넣고 끓인 김칫국은 너무 짜서 한 숟갈을 넘기는데도 힘들었고 후식으로 먹을 생각에 가져온 케이크는 너무도 달아 젊은 시절 부산에서 카추샤 생활을 했다는 마주보고 앉은 노신사분과 나누어 먹었다. 입 안 가득 남아있는 단맛을 없애기 위해 식사 후 가져온 껍질째 먹는 사과는 삐뚤삐뚤 모양새도 볼품없었지만 당도나 부드러움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에서 생산 재배되는 사과보다 훨씬 떨어져 맛있다는 생각은커녕 껍질 두께까지 두꺼워 한참동안 씹어 먹느라 불편했다.
먹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 곧바로 지나쳤던 먹거리 중에는 몇 종류의 빵과 음료, 아이스크림, 슬러쉬 등 그야말로 살이 찔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어디에도 우리나라 음식처럼 생나물이나 야채를 삶아 무친 종류는 보이지 않았고 맛보기로 조금 가져다 먹은 샐러드는 야채와 콩, 옥수수 등 종류는 많았으나 내 입맛을 사로잡을만한 건 눈에 띄지도 않았을 뿐더러 샐러드 위에 끼얹어 먹는 소스 역시 입맛에 맞지 않아 식당에 들르기 전 보았던 곳곳의 풍경에 은근히 기대했던 음식 맛은 여지없이 무너졌다. 종가 집에 태어나 한집안의 맏며느리로 시집가 산 세월이 어언 15년이 되니 한국음식 만들고 먹는데 워낙 익숙해 외식할 기회가 있으면 양식이나 일식을 선호하는 내 기호가 그 날처럼 망가지기는 처음이었다. 대체적으로 달고 짠 그곳 음식은 담백하고 상큼한 걸 좋아하고 매콤하거나 얼큰한 걸 좋아하는 내 입맛과는 거리가 너무도 멀어 음식 하나에서도 나는 한국인이라는 걸 뼛속 깊이 느꼈다.
현재 우리나라에 주둔하고 있는 미 군사시설 대부분이 그 옛날 일본군들이 장악하고 있던 곳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본인들이 일종의 신사참배와 비슷한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서 만든 작은 석탑(캠프워크 내에 있음)을 눈으로 직접 보니 가슴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올랐다. 치욕적인 역사의 잔재를 치우기보다 교훈으로 삼고 있다는 설명을 들어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석탑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있는 이유를 이해하지만 그 건물이 남아있는 한 그곳을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은 이 땅이 한때 일본에게 나라의 주권을 빼앗긴 채 암울한 시대를 살아내야 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답답해왔다.
자국국민의 배워야 할 권리를 위해 군사시설 안에 유치원에서부터 고등학교까지 12학년의 school(학교)을 운영하고 있다는 설명에는 그렇구나 할 정도의 반응만 보였는데 5년에 한번씩 해외파견을 의무로 하고 있는 미군 젊은 병사들을 위해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학업을 계속 할 수 있게 도와주는 학점은행제로 운영하고 있는 몇 개의 단과대학(a college)까지 와 있다는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으며 캠프헨리에서 캠프워크로 이동하는 중에 본 극장은 그야말로 신선한 충격이었다.
흔히들 PX라고 말하는 그곳을 둘러보았는데 자국에서 들여온 물건들로 빼곡하게 차 있었다. 그 속에서도 우리나라 닭고기와 야쿠르트, 사과, 수박 등 몇 가지 품목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다. 진열되어 가지런히 정돈된 식료품이나 생필품은 어느 곳에서도 비교 대상이 될 수 없을 만큼 싼 가격이었지만 우리 일행 중 어느 누구도 그곳에 있는 물건을 살 수 있는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맨 마지막 일정으로 들른 가정집은 미로처럼 생겨 집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본 모습과 달리 그 규모가 제법 큰 편이었으며 각 공간마다 독립성이 최대한 보장된 그들만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우리가 방문한 집의 안주인이 한국여인이라 그런지 다른 집과 달리 집 입구에 태극기와 성조기가 양쪽에 나란히 꽂혀있는 게 눈에 띄었다. 주인의 안내로 둘러본 집안 곳곳의 물건이나 장식이 거의 우리 것으로 채워져 있어 잠깐 동안 머문 그곳이 낯설지 않아 좋았다. 특히 여름밤에 좋다며 소개한 작은 마당은 가족이 함께 또는 따로 서로의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었는데 정확한 명칭은 아니지만 아이들 사이에서 봉봉이라고 부르는 둥근 원 위에 올라가 뛰면 위로 솟아오르는 놀이기구와 가족이 함께 운동할 수 있는 높이에 설치된 농구대와 크기가 다른 두 대의 자전거 그리고 가족이 둘러앉아 차를 마실 수도 있고 가까운 이들과 다과를 즐기며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둥근 테이블이 파라솔 아래 깔끔한 모습으로 놓여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평화스러워 보였다.
우리나라에 와 있는 미군들 대부분은 한국은 정말이지 오고 싶지 않은 나라 중 하나라고 했다. 전쟁이 일시적으로 휴전하고 있는 지역으로 이해하고 있는 우리나라는 안전문제도 그렇고 같은 영어권이 아니기에 의사소통에 있어서도 불편을 겪고 있기 때문에 이래저래 한국은 기피 대상국이라고 한다. 이런 생각을 가진 미국인들을 바라보는 우리 국민의 시선 또한 곱지만은 않은데 무엇보다 잊을만하면 툭 불거져 나오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가장 우려하는 것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 이외에도 미군부대주변에 사는 한국인들의 재산권리행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 역시 이래저래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고...
한때, 우리나라 땅에서 미군이 철수할 날이 하루빨리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사람 중 한사람이었던 나는 그들이 주둔하고 있는 상황이 국가안보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들을 위해서 국방부에서 지원하고 있는 물적, 인적 자원이 우리 국민들이 예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걸 알고 있기에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지만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일으키고 있는 크고 작은 사건들로 인해 적잖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되지 않은 오늘날 우리의 현실로 인해 미군의 주둔이 꼭 부정적인 요소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언젠가부터 하게 되었다. 그들의 주둔으로 인해 국내외 정치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지 하는 골치 아픈 설명은 배제하고라도 미 군사시설 내에 있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일자리(약 90%가 한국인)가 창출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불과 서 너 시간 밖에 머물지 못했지만 둘러본 많은 모습들은 대한민국 속의 작은 미국을 경험하기에 특별히 모자라거나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머나먼 타국 땅에서도 그들만의 문화를 즐길 수 있게 배려한 모습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사령관 집무실 한쪽에 마련된 소파인지 침대인지 쉬 구분가지 않는 물건은 그들이 형식보다는 실질을 중요시하고 자유스러움을 추구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했고 실내를 장식한 각종 공예품과 여러 장의 카펫, 그림 등은 다른 여러 나라를 돌며 근무할 때 수집한 것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는 설명에는 와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뜻밖의 공간에서 우리국민들의 불멸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 거북선 모습을 만났다. 비록 액자 속에 전시된 작품에 불과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군인정신을 가장 존경하기에 액자로 걸어두고 마음을 날마다 새롭게 한다는 사령관의 마음을 그곳 안내자로부터 전해 듣고 내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곳곳에서 마주친 미 병사들에게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시원스레 하지 못해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그 날 나는 특별한 경험을 했음에는 틀림이 없다.
2005년 11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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