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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2. 10.

아주 오래 전 마광수 교수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수필집을 읽은 적이 있다. 수많은 젊은 여성들이 그 책을 읽고 검정 메니큐어를 바르고 마치 야한 여자에 속한 특별한 여성이라도 된 듯 착각에 빠져 한동안 화장품가게만 불티나게 장사가 되었다는 우스운 소리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적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지금처럼 인터넷이 우리나라에 정착되지 않은 때라 여성을 상품화한다느니 성에 관해서 너무 노골적이라는 등의 이유로 언론에서 많이 떠들었다. 그 결과 마 교수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학 강단에서 열정적으로 강연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일 수 없었다. 문학에 대한 개인의 생각이 상상력의 모험이며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 이며 또한 기존의 가치체계에 대한 ‘창조적 반항’ 이어야 한다고 아무리 외쳐도 성에 대한 생각이나 표현의 자유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요즘에도 여전히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인 것 같다. 아무튼 한 개인의 생각이 언론과 여론이라는 벽에 밀려 자신의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몇 년을 힘들게 살아 왔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도 가끔은 야한 여자가 되고 싶을 때가 있다. 야하다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야하다는 말속에 들어 있는 깊이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고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표현할 줄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그리하여 야한 여자는 음담패설에 가까운 말과 노출이 심한 옷차림 또는 절제되지 못한 무분별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감성과 이성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줄 아는, 어찌 보면 자신의 것을 잘 챙기는 조금은 영악한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지만 말이다. 사실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인생이 뒤바뀐 경우가 수 없이 많겠지만 이경자 소설(절반의 실패),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에 나오는 여성이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아닐까 한다. 수많은 영화와 소설에서 여자를 주제로 많이 다루었지만 시대를 초월한 여성으로서의 대우는 지금의 현실에서도 그리 많이 달라진 것 같지는 않다. 물론 여성 상위 시대니 남성의 지위가 땅으로 떨어졌다는 등의 말들은 하지만 아직도 가정 내에 있는 가부장적인 면이 많이 남아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두해 전 컴퓨터 관련 자격시험에 합격 한 적이 있는데 주변에서 그 나이에 컴퓨터는 뭐고 자격증은 또 뭐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 취직 할 것도 아니면서 뭘 그리 많이 배우고 싶어 하냐고 야단들이었다. 그 중에서 내 또래의 친구들이 그런 말할 때가 제일 속상했고 이해할 수 없었다. 여자팔자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달라진다는 식의 논리를 연령과 상관없이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무척 놀랐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고... 이런 말을 하는 나 역시도 아주 가끔은 여자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해 잘할 수 있는 것마저도 과감히 포기해야 하는 상황을 맞곤 한다. 처음에는 내 나름대로 가족을 이해시키려고 노력도 하지만 어느 시점에 도달하면 마찰 보다 적당한 타협점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그럴 때면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어느새 또 나 자신보다는 시댁어른과 남편, 아이들이 마음에서 우선순위로 자리 매김하고 있음을 부인 할 수 없다. 남성 우월주의가 팽배한 이 땅에 태어난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음직한 이야기인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인되는 것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빛깔과 소리들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도 곁을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즈음에서 내 사는 이야기를 할까 한다. 동갑내기 남편은 아주 가끔 내가 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하나 지적하는, 매사에 옳고 그른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남편의 그런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우리 집 가훈 또한 "인간이 되자(바른 생각, 바른 행동)이다. 특별히 내가 잘못한 일이 없는 날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다정한 사람이지만 내 잘못을 지적할 때는 동갑내기 친구처럼 편한 사이가 아니라 스승이 제자를 나무라는 매서움에 아주 잠깐 나를 주눅 들게 한다. 1년에 몇 번 될까 말까한 일이지만 내 욕심 때문에 남편에게서 훈장님 말씀 같은 훈계를 들어도 대꾸를 할 수가 없다. 내가 말해야 할 부분이 없어서가 아니고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보면 남편의 말은 어느 것 하나 틀리지 않음을 인정하는 까닭이다. 그런 일이 있은 후 한동안 잠잠하던 내 마음에 욕심이 슬슬 되살아난다.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또는 엄마라는 이유, 혹은 한 사람의 아내로서... 여러 가지 내 역할에 부합하는 일들로 인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우선적으로 줄여야 할 때 왠지 억울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며칠 전, 미장원에 가서 4년 동안 생머리만 고수한 고정이미지를 깨고 웨이브파마를 했다. 딸아이와 주변 사람들은 파마덕분에 한결 이미지가 더 부드러워졌다며 달라진 머리 모습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었지만 남편과 아들 녀석은 파마한 내 모습을 재미있다는 듯 한참을 놀렸다. 파마는 아줌마가 하는 거라는 이야기부터 평생 바라봐 주고 사랑해 줄 사람은 난데 왜 굳이 내가 싫어하는 머리를 했느냐는 등 별 별 소리를 다했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여자가 파마머리를 풀고 생머리를 길러 찰랑거리며 다니는 모습이 청순하면 얼마나 더 청순해 보이겠느냐만 대부분의 남성들은 긴 생머리를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내 이미지는 생머리일 때가 더 예쁘다는 남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나라는 존재가 끊임없는 관심의 대상이 되고 처음처럼 늘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설레는 마음으로 확인하고 싶은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나라는 사람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에 여자라는 벽을 스스로 깨지 못한 채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채우지 못한 미완의 삶을 살고 있다. 내 것을 잘 챙기는 것 같으면서도 남편의 그늘 아래서 더 행복을 느끼고 안주하고 싶은, 욕심인지 나약함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나 역시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겪는 여러 가지 상황들에 대해 강한 반박을 하고 싶지만 생각만큼 쉽지 않음을 알고 있다. 사회적 문제이든 가정 내의 문제이든 그런 요소들을 뛰어 넘을 수 있는 힘이 아직도 내게는 많이 부족함을 변명처럼 고백하면서 오늘도 한 개인으로서 좀 더 내 인생에 대해 노력할 뿐이다. 단지 내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뭔가를 결정하지 못하는 일이 앞으로는 없기를 바라면서......


 


2000년 가을에 쓴 내용을 2002년 10월 09일 부분수정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