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가만히 있기가 싫어서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집 근처 유치원에서는 벌써 크리스마스트리장식을 만든다고
낯익은 선생님 몇 분이 아이처럼 깔깔대며 신이 나서 죽겠다는 표정으로
때마침 그곳을 지나는 나에게 웃음 묻어나는 기분 좋은 얼굴로 부른다.
"잠깐 들어오셨다가 가세요."
생글거리는 처녀 선생님의 얼굴이
문득 산타할아버지의 방울 달린 모자가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에
혼자 피식 웃으며 가벼운 인사를 하고 되돌아서 시장으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었다.
평소 편리하다는 이유로 가까운 곳에 재래시장을 두고도
집과 거리가 먼 할인점이나 백화점을 주로 이용했는데
재래시장을 반 바퀴 돌 즈음 편리함과 견줄 수 없는
사람냄새 나는 시장의 모습에 천천히 매료되는 나를 느끼며
허름하고 비좁지만 갖가지 물건들을 진열해 놓은 상점과
금방이라도 삐거덕 소리를 낼 것 같은 작은 식당 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꽁꽁 언 생선을 손님의 주문에 따라 익숙한 솜씨로 척척 손질해서 건 내주며
"또 오세요." 라는 말을 잊지 않는 마음씨 좋게 생긴 생선 가게 주인의 모습을 스치는 동안
몇 일 전 친구에게서 받은 노란 편지지가 생각나서 발길을 가장 가까운 문구를 파는 가게로 향했다.
그곳에서도 역시 크리스마스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색색의 추리장식에 필요한 반짝이와 장화, 종, 선물상자, 산타할아버지, 지팡이......
평소 안면이 있다는 이유로 가게 주인은 아는 척을 하며 반갑게 인사를 한다.
"편지지 보려고요."
내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오늘은 여느 날과 좀 다른 것 같네요."
주인 여자는 내가 원고지만 사 가지고 가더니
오늘은 이 나이에 웬 편지?
그런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내 마음을 안다는 뜻일까...
아무튼 난 진열대에 있는 여러 가지 모양과 색깔 중에서
내 마음에 와 닿는 편지지 세 종류를 고르고
제일 먼저 누구에게 어떤 편지지에 어떤 글을 쓸까 하고 내심 행복한 고민에 들떠있었다.
은행잎이 수놓은 듯한 편지지와 낙엽모양이 눈에 확 들어오는 편지지,
가을 하늘처럼 맑고 푸른 편지지...
마지막 편지지는 서정주님의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 라는
시 한 구절이 꽃 물처럼 스며드는 느낌이 좋아서 샀는데
볼수록 내 나이에 어울리는, 푸른빛이 그냥 좋은 하늘을 닮은 편지지였다.
아무려면 어떠랴 싶지만 나이가 한 살 더 먹어가니 맑고 환한 것만 들어오니
내 눈을 내 마음을 어찌 다 표현할까 싶은 게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 사랑도 아날로그 방식이 좋다.
디지털 시대에 문명의 이기를 즐기고 살지만 그래도 나는
사랑이라든지 만남이라든지 우정이라든지 하는
무게를 젤 수 없는 유형의 마음들에 있어서는 아날로그 사랑방식이 좋다.
빠른 메일보다는 한 줄의 정성이 깃 든 편지가 받고 싶다는 내 마음을 충족시킨 사건,
얼마 전에 받은 노란 편지지에 쓴 ‘아름다운 친구라는 ......’
그녀의 편지는 여고시절의 나로 돌려놓은 착각마저 불러일으키고도 충분했음을 그녀는 알까...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내가 얼마나 들뜨고 행복했는지를......
편지지에 그 누군가를 향해 마음을 나눈 지도 참 오래된 일이다.
나날이 급변하는 시대에 뒤쳐질세라 컴퓨터를 하고 나서부터는
마음도 정성도 빨리빨리 전하고 받는 상황이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그 편리함에 참 좋다라는 생각도 하지만
그 누군가에게 전해줄 마음의 선물을 몇 일을 고민하고 골라서 우체국으로 달려가
빠른 등기로 소포를 부치고 내 마음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뭔가 잊고 산 느낌은 지울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군가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날아들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다.
난 아무래도 양면성을 가진 사람인가 보다.
도시의 화려함과 시골의 고즈넉한 분위기 중 어느 것 하나 멀리하고 싶지 않기에
현대 생활을 가장 편리하게 이용하는 많은 것들로부터 이미 익숙해진 나지만
복고풍의 사람 사는 향기가 그리워지는 걸 보면 내 욕심이 너무도 크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린다.
오늘은 나도 그 누군가에게 그리운 사람이 되고 싶은 날이다.
내가 고른 편지지에 내 마음을 실어 우체국에 직접 가서 우표를 붙이고
내 정성이 깃 든 선물 하나를 고르는데 다리 품을 팔아서라도
받는 이의 취향이나 나이 혹은 성별을 고려해서 좀 까다롭게 골라
내가 고른 포장지에 싸서 직접 전해 주고 싶은 날이다.
문득 문득 편지가 쓰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오늘도 그런 날 중 하루에 속하는 날이다.
안개 낀 이른 아침에 편지를 써도 좋지만
늦은 밤 내 편지를 읽고 반겨줄 사람을 떠올리면서 내 마음을 그려내고 싶다.
꽃잎 같은 부드러움과 한 폭의 수채화 같은 그리움을 섞어서
그 누군가에게 내 글씨체로 또박또박 써 내려가고 싶다.
오늘은 눈 마주쳐 느껴지는 그런 온기 하나로
그 동안의 무심함에 대한 미안함과 보고픈 마음을 담아 편지를 써야겠다.
미안해, 보고 싶어 라는 말을 섞어서 ......
2000년 11월 30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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