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문턱이 다 젖도록 연일 비가 내리더니 지금은 비도 그치고 하늘 저편 너머로 작은 햇살 같은 밝은 구름이 수줍은 듯 살며시 우리들 삶 속으로 들어옵니다. 째깍 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새로운 날들에 대한 침묵으로 내 작은 어깨에 살며시 내려앉는 착각을 느끼며 생각의 보물창고인 옥상으로 올라갔습니다. 비 그친 주변은 먼지 하나일 것 같지 않은 정갈함을 하고 유치원 옆 담을 타고 도는 전봇대 위에는 까치 서너 마리가 앉았다 일어서듯 뺑뺑이를 하고 그 속에 서 있는 나는 아무런 걱정 없는 얼굴로 생전 처음 보는 구경꾼 마냥 야! 까치다 하고 제법 큰 소리로 외쳐봅니다. 오늘은 아무래도 반가운 손님이 찾아올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학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삐삐 묻은 자리 옆에 풀 같은 것이 많이 올라온 것 같다며 최명희 소설 ‘혼 불’을 읽고 있는 나에게 와서 함께 가자고 자꾸만 채근을 합니다. 혼 불은 작가 최명희가 1980년 봄 4월부터 첫 장을 쓰기 시작하여 만 17년간 오로지 이 작품 하나에 투혼하며 집필해온 작품으로 세종문화상, 여성동아상, 호암예술상 등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작년 이맘때쯤으로 기억되는, 서점에서 유난히 눈길을 끄는 제목 ‘혼 불’,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책이 사고 싶었습니다. 10권의 책을 7만원을 주고도 기분은 마냥 좋았습니다. 지갑이 가벼워지는 무게보다 혼 불이라는 책의 느낌이 가슴을 따스하게 적셔 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책의 부피가 주는 무게도 그저 고마울 뿐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가을을 타는지 자꾸만 생각이 많아집니다. 그런 날이면 습관처럼 지나간 책들 중 한권을 꺼내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참으로 이상한 일 입니다. 그 날의 느낌에 따라 같은 책도 어찌 이리 달리 느껴지는지... 마치 늘 바라보는 앞산도 함께 가는 이와 그 곳을 찾을 때의 내 심정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오늘도 나는 한 권의 책에서 낯익은 혹은 낯선 나와 마주했습니다.
딸아이의 채근에 보던 책을 빛깔 좋은 은행잎 두 장으로 읽고 있던 페이지를 표시해두고 1층 주차장 텃밭으로 내려가 보았습니다. 저번 장마가 거의 끝날 무렵에 심어 두었던 배추가 자주 내리던 비에 많이 상한 것 같아 싱싱한 것만 골라 몇 포기 남겨두고 다 뽑아내고는 별 기대감 없이 실파와 가을배추, 시기에는 맞지 않지만 상추씨를 조금씩 뿌려 두었습니다. 자연은 정직하다고 누군가 그랬죠. 얼마 후 뾰족 뾰족 바늘 침 같은 실파가 그 모습을 드러내는가 싶더니 배추랑 상추가 서로 키 자랑하듯 땅 속을 뚫고 힘차게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도심 한가운데도 자연의 냄새는 다른 가 봅니다. 어찌 그리도 잘 아는지 날마다 비둘기 대 여섯 마리가 우리 집 텃밭으로 날아와 난장판으로 만들고는 푸드덕 어디론가 날아갑니다. 처음에는 심통도 조금 났지만 비둘기도 살아남기 위해서 저럴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그냥 내 버려두고 싶었습니다. 결국 내 소중한 텃밭은 비둘기와 동네 강아지와 고양이의 놀이터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한동안 주차장 셔터를 내리지 않고 열어둔 것에 대한 후회를 했지만 따지고 보면 그리 속상할 일도 아니다 싶습니다.
엉망인 텃밭을 날마다 베란다 너머로 바라보고 있자니 괜히 내가 게을러서 저 지경이 된 것 같아 며칠 전 텃밭을 삽으로 고르고 겨울 초를 심었습니다. 연이어 내린 비로 인해 땅은 생기를 찾고 덕분에 겨울초가 땅속에서 고개를 쏙 디밀고 나야 하고 세상을 향해 힘차게 나왔습니다. 그 놀라운 힘에 딸아이와 아들 녀석은 귀중한 보물을 찾은 것처럼 소리를 질러댑니다. 10평 남짓한 텃밭은 이제 아이들의 꿈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맑은 표정에서 나는 또 다른 세상을 보았습니다. 길조라는 까치의 반가운 소식보다도 더 귀한 생명의 소중함을, 내 아이와 작은 씨앗 하나의 그 놀라운 생명력에서 살아 있음에 대한 아름다움을 말입니다. 새로운 시작은 늘 이래서 설레는 행복인가 봅니다. 11월의 길목에서 오늘 내가 본 새로운 씨앗 여행이 이 글을 읽는 이들의 가슴에도 한줄기 힘찬 에너지로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향한...
자신을 향한...
사람과 사랑에 대한...
작지만 꺼지지 않는 귀한 불씨가 되어 행복한 나날이 되기를 기원 드립니다.
2000년 11월 02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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