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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봄볕에 취해서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2. 26.

넓은 창 가득 하늘이 들어오고 눈부신 햇살이 드리우진 커턴 사이로 내려앉으면

마음은 연분홍 꽃물에 취한 사람처럼 행복하다.

그다지 긴장하지도 않아도 좋고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안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녀도

누구하나 이유 없이 설레는 내 감정을 방해하는 사람은 없다.

나이를 잊어도 좋은 순간이다.

죄가 있다면 봄볕이 하도 따사로워 나도 모르게 취한 죄 밖에...

 

특별히 가야 할 곳도 정해진 바 없고 누구를 꼭 만나야 할 약속도 없지만

무작정 집을 나서도 좋은 봄날,

전화 한 통화에 반가운 마음으로 차 한 잔 할 벗이야 있지만 이런 날은 혼자가 더 좋다.

발길 닿는 대로 산책을 해도 좋고 그림을 보러가도 좋고 서점에 들러도 좋다.

우연히 들른 꽃집에서 노란 후리지아 한 아름 사는 여유까지 챙길 수 있다면 즐거움은 배가 될 것이다.

 

거리를 나서면 여인들의 옷차림이 화사한 봄꽃처럼 화려하다.

덩달아 내 마음도 열일곱 소녀처럼 밝은 옷에 눈길이 간다.

들꽃처럼 환해지고 싶은 내 마음이 어느새 꽃물처럼 화사해지는 순간이다.

여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자라는 말을 실감하는 계절이다.

 

지나가는 이들을 관찰하는 일은 언제나 흥미롭다.

바지의 길이가 너무 길어서 땅바닥을 청소하듯 걷는 사람,

짧은 치마 길이 때문에 보는 이로 하여금 더 긴장하게 만드는 사람,

선글라스에 귀고리를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사람,

저마다 개성의 차이가 너무도 다르다.

 

단신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나 역시 짧은 치미를 즐겨 입고

햇빛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짙은 색의 선글라스를 애용하는 편이지만

아이를 낳고 난 후부터 지금껏 귀고리는 하지 않는다.

함께 사는 이가 너무 야해 보인다는 이유로 싫어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화사한 것과 튀는 것의 차이라고나 할까...

 

내가 꿈꾸는 여성상은 우아하며 여성스럽고 생기발랄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듣는 이의 기분을 상승시켜 주는 애교 있는 여자이면서

어딘가 풍기는 멋이 지적이기를 바라는...

 

분위기 있는 공간에서 좋아하는 음악과 함께 커피한잔을 마시며

누군가를 오래도록 기다려 본 적이 있는지?

아마도 기다려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사람이 모두 내가 기다리는 사람일 것 같은 생각에

수시로 입구 쪽으로 열리는 귀와 눈동자를 ...

사랑은 그렇게 오고 가는 것이다.

길가 행인의 발걸음처럼 ,

한 잔의 커피처럼,

봄볕에 취해서 꽃잎에 입맞춤하는 열린 마음처럼...

 

난 취했다.

봄바람에 취하고

봄꽃에 취하고

봄볕에 취하고

사람에 취했다.

 

 

 

 

2001년 03월 21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