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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날씨 변화에 따른 심리묘사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3. 11.

서울에는 눈이 온다는데 이곳 대구에는 바람이 몹시도 불어옵니다.
그 바람이 문득 현진건의 빈처를 닮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오늘 바람은 가난한 사람들 문틈 사이로 기어 들어오는 칼바람 같다는 느낌입니다.


병원 가는 길목에 몇 개의 포장마차가 있습니다.
호떡을 파는 아주머니와 잉어 빵을 파는 아저씨 그리고 점심시간이 훨씬 지난 시간 문을 열어

퇴근 후 호주머니 깊숙이 푹 찔러 넣은 손을 살며시 빼며 어묵 국물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포장마차...
오늘처럼 바람이 대나무소리를 내는 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에 언 손과 두 볼을 녹이는 사람들이 왠지 정겨워지는 날입니다.


바람에도 향기와 빛깔이 있다는 것을 예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요즘처럼 낮 시간 혼자 있는 날이면 상상 속에 나를 던져 놓고
요리조리 마음대로 그림을 그립니다.
오늘도 그런 날 중의 하루입니다.
   

그 바람이 내가 아는 모든 이들에게 따뜻한 훈김 같은 느낌으로
다가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단골미장원 문을 열었습니다.
젊은 헤어디자이너는 일본으로 유학 가기 위한 첫 단계로 부산에서 열린다는

헤어 쇼에 참석하러 갔기에 배가 남산만하게 부른 젊은 새댁이 제 머리카락을 만졌습니다.
갈색과 밝은 노랑 빛 도는 톤으로 염색을 하고 미용실 문을 열고 나오자

어느새 바람은 비로 변해있었습니다.


비가 내리면 이성보다는 감정에 익숙해지는 것은 비단 혼자만의 느낌은 아니겠지만

내리는 비를 베란다 창문 너머로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우울해지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랫말가사에 마음 한구석 멈칫거리는 ...
햇살이 맑은 날 보다 비가 내리는 날이 사람과 사람사이를 더 가깝게 하고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을 다른 날보다 더 쉽게 터놓을 수 있다는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본 말을 조금은 이해 할 것 같은 날입니다.


샹송이 흘러나오는 거실에 앉아 내리는 창밖을 무던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노라니

어느새 두 볼을 타고 내리는 뜨거운 액체가 입 근처로 떨어집니다.
짭짜름하면서도 뜨거운, 가끔은 이유 없이 울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볼 때, 감동적인 드라마를 볼 때 내 행복과 아무런 관계가 없어도...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은 영혼을 맑게 씻어내려 주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울고 난 뒤의 개운함 내지는 가벼움,

하지만 나라는 여자는 소리 내어 울어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누가 볼세라 얼른 태연한 척 눈물을 훔쳐내는 여자...
아직도 쓸데없는 자존심 같은 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식은 아닌데도 목 놓아 울어 본 적이 없는 걸 보면...


오늘은 그냥 내 감정의 골짜기를 물 흐르듯 내버려두고 싶습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비가 내려서 더 포근한 날
가끔은 일상의 나를 벗어 던져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이 그런 날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나와 만나는 날.

 

 

 


2001년 2월 15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