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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향기

사랑하는 어머니, 생일인 오늘 약속하나 할게요.

by 시인촌 2005. 12. 23.

어머니, 어제는 24절기 가운데 밤이 가장 깊은 날인 동지(冬至)이자 음력으로 오빠 생일이었어요. 어머니 당신이 살아 계셨더라면 틀림없이 정갈하게 목욕재계하시고 절에 가셔서 불공을 드렸겠지요. 하나뿐인 외아들 그저 건강하고 하는 일 잘 되게 해달라고도 빌고 다른 자식들과 손자, 외손자, 사위 할 것 없이 모두의 건강과 안녕, 그리고 지금보다 내일이 더 번성하기를 기원했겠지요. 기억나네요. 붉은 색을 띤 곡식인 팥과 찹쌀로 빚은 새알심을 넣어 팥죽을 쑤어 조상신에게 올리는 시각에 맞춰 집안 곳곳에 팥물을 뿌려 귀신을 쫓는 의식을 행하셨던 일과 팥죽을 싫어하는 어린 제게 팥에 든 새알심을 나이대로 먹어야 한 살 올라갈 수 있다며 은근슬쩍 사랑스러운 장난을 하셨던 일과 두 손 모아 지극 정성으로 빌고 또 빌던 모습이...

 

 

어머니, 붉은 색인 팥은 밝음, 불, 양기를 상징한다지요. 그리고 귀신을 쫓는 색이기도 하고요. 어제 팥죽을 먹으면서 생각했어요. 역사평론가인 조용헌님에 설명에 따른 [동지를 맞으면서 깨치는 이치는 ‘궁즉통(窮則通)’의 원리라는 것과 동지는 시작이요 축복의 절기이다.] 라고 한 설명에 관해서, 그 말 정말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살면서 그 어떤 것도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은 없었으며 기다림이 없는 기쁨도 없는 것 같아요.

 

 

어제 오빠한테 전화를 했어요. 팥죽은 먹었는지 아침 생일 밥은 잘 먹었는지, 말은 안 했지만 전화로 들려지는 목소리에서 느낄 수 있었어요. 오빠가 어머니를 많이 그리워한다는 사실을... 어머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해요. 셋 살 터울인 오빠와 저를 어떻게 음력 하루 차이로 낳으셨는지, 그 생각만 하면 기분이 참 좋아요. 어머니 당신은 그랬어요. 아들 딸 구별 않고 하루차이인 제 생일도 기꺼이 챙겨주셨지요. 덕분에 가족들은 연이어 찰밥과 미역국을 먹어야했지만 가족 중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도 없었고 생각해보면 전 참 좋은 환경에서 자랐어요. 그 덕분에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도 생일날이면 찰밥에 미역국을 꼭 챙겨 먹는 사람이 되었어요.

 

 

어머니와 아버지의 사랑과 정성으로 태어난 제가 이렇게 사람구실하고 살 수 있게 길러주시고 사랑을 주셔서 감사해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요. 지금의 제 몸과 마음은 무게를 달수가 없다는 생각...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 묻고 싶으세요. 오늘날 거침없는 행복을 이야기 할 수 있는 제 행복 속엔 저 혼자만의 공으로 만들어진 것은 그 무엇도 없다는 사실을 안다는 뜻이에요. 부모님의 사랑과 정성과 눈물 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관심과 충고가 있었는지, 이런 생각만 하면 기억 속에 가물거리는 이름도 고맙고 살아있어 느낄 수 있는 모든 것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도 없어요. 그 중에서도 제 삶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평생 반려자인 한 남자의 사랑과 정성 그리고 제가 낳은 두 아이의 사랑스런 모습은 저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 준 부모님 은혜만큼이나 제겐 축복이에요.

 

 

어머니, 유난히 겨울을 타는 저는 요즘 겨울철이면 겹겹이 껴입어 여윈 몸집이 두 배로 커 보였던 어머니 당신을 자꾸만 닮아가요. 보기도 싫고 행동하는데 불편하다며 입지 않았던 내의도 입고 집안에서도 따스한 아랫목만 찾게 되고, 아무튼 올 겨울 이곳 날씨는 그렇지 않아도 나라경제가 힘든데 전국이 폭설이나 강추위로 몇 천억 원의 피해가 났다니 뉴스 듣고 보는 게 겁날 지경이에요. 눈이 오지 않기로 유명한 대구도 12월 들어 벌써 네 번이나 눈이 내려 쌓인 눈 치우느라 고생했는데 시어머니 산소가 있는 정읍에는 65년만의 폭설이 보름이 넘게 쏟아지는 바람에 쌓인 눈을 치울 엄두도 못 내고 그야말로 호남지방에는 눈이 아니라 웬수라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쏟아지고 있어요.

 

 

어머니, 생각나세요. 제 생일 전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당신께 고마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전하고 싶어 어린 신애를 데리고 남편과 우리 세 식구 어머니 집에 갔었던, 그 날 집에서 미리 준비한 LA갈비, 잡채, 몇 종류의 부침과 튀김, 2단 케이크와 과일, 조기, 미역 등을 가지고 가서 다음날 이른 새벽에 일어나 행복한 마음으로 어머니 당신을 위한 상을 차렸던 일과 홀로 계신 어머니 당신에게 말동무가 되어주고 도움을 주었던 분들을 불러 함께 식사도 하고 오지 않은 이웃에겐 음식도 갖다드린 일을, 그 날 어머니 모습 참 행복해 보였어요. 여자는 자식을 낳을 즈음이면 온 몸이 쑤시고 팔다리가 아프다했는데 저희 세 식구 찾아와 이웃 사람들에게 마음을 나누었으니 어머니 당신은 아픈 것도 잊으신 것 같았어요. 집으로 돌아올 때 고맙다며 눈시울 적시던 어머니 당신을 보면서 그런 기회 자주 만들어야지 생각했는데 살면서 생각만큼 어머니 당신을 챙겨주지 못했어요.

 

 

어머니, 올해는 유난히 춥고 폭설이 잦아 배추 값이 그야말로 금값이에요. 이런 저런 이유로 피일 차일 미루다 보니 우리 집 김장은 지난주 수요일에 담갔는데 배추 한 포기에 사천원씩 주었어요. 이번에도 도와주겠다고 말만 하라는 언니들은 부르지 않고 신랑과 함께 재미있게 했어요. 어머니도 아시지요. 그 사람 얼마나 야무지고 다정한 사람인지, 덕분에 아이들과 제 얼굴에 늘 웃음꽃이 피어요.

 

 

다음 주면 아이들도 겨울방학에 들어가요. 전교 1등 하면 미국으로 여행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신애는 비록 전체 1등은 놓쳤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에 저와 함께 TBC 호주, 뉴질랜드 문화탐방에 합류하기로 했어요. 여행일자는 1월 14일이고 기간은 8일이에요. 신랑은 기왕 갈 거 10일로 하라고 하지만 남아있는 두 사람의 식사며 빨래 등 많은 부분이 신경 쓰여 7박 8일로 결정했어요. 집에 진돗개를 기르니 가족 모두가 떠나는 여행은 이틀 이상은 무리라 앞으로는 짧은 여행은 가족 모두 함께 하고 긴 여행은 아빠와 아들, 엄마와 딸 그렇게 둘씩 짝이 되어 떠나기로 합의를 마쳤어요. 재석이와 오 서방은 우리가 떠나기 전이나 다녀온 후에 국내로 며칠 여행할 계획이고요.

 

 

어머니, 오늘 아침에도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가 주신 찹쌀과 팥으로 맛있는 생일 밥을 해 먹었어요.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어머니 생각이 어찌나 간절하던지 끝내 울컥 하고 솟구치는 눈물을 멀리할 수가 없었어요. 어머니 생각에 젖어 살아가는 이야기 전하는 동안 바라다 보이는 앞산은 눈이 내려 한 폭의 동양화가 되어버렸어요. 동양화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요. 며칠 전 동양화 몇 점을 구입했어요. 어떤 그림은 높이가 제 키만큼이나 커 제 힘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는 것도 있었지만 기존에 있던 그림이며 액자로 집안 곳곳을 갤러리처럼 꾸며놓았더니 여름 동안 시원하고 넓게 표현한 분위기가 따스한 분위기로 변신을 했어요.

 

 

아, 보고 싶은 어머니!... 당신을 향한 사랑과 정성을 표현하고 싶어도 표현할 수가 없는 지금 저는 가슴이 아파요. 그래도 오늘만큼은 누구보다 더 환하게 웃을래요. 제게 살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어머니, 세상 그 어떤 언어로도 어머니 당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전할 수가 없지만 어머니가 제 어머니였기에 행복했고 제가 어머니 당신의 딸로 존재했기에 너무도 행복했어요. 사랑하는 어머니, 생일인 오늘 약속하나 할게요. 기쁠 때나 슬플 때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동안 어머니 당신을 따스한 햇볕처럼, 흐르는 물처럼, 포근히 감싸주는 큰 산처럼, 길 알려주는 등대처럼 그렇게 제 마음 속에 두고 기억하고 환히 밝히겠노라고......

 

 

 

 

2005년 12월23일 - 음력 11월22일 생일날 오후에 쓴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