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신 집안의 맏며느리인 나는 추석이 지난 지 벌써 며칠이 흘렀건만 이런저런 이유로 올해 연세가 팔십인 친정어머님을 여태 찾아뵙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저녁을 먹은 후 설거지를 하다 말고 밀려드는 그리움에 성질 급한 고양이처럼 급히 전화기를 들었다. 팔순인 어머니는 전화벨이 울리자마자 대뜸 첫마디가 "누고?, 숙이가?" 그렇게 신분절차를 시작으로 다가오는 일요일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는 내게 읍내 장에 가서 싱싱한 미꾸라지 한 사발 사와서 맛나게 끓여 놓을 테니 아침 일찍 오라 신다. 내가 둘째 아이를 낳은 다음 해 뇌출혈로 쓰러진 적 있는 어머니는 그 후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날에는 자신의 몸 하나도 챙기기 어려워 자식들 가슴을 저리게 하지만 오늘 전화에서는 목소리에 유난히 힘이 들어가신다.
추어탕을 좋아하는 막내딸과 백년손님인 사위에게 대접 할 요량으로 5일장이 열리는 읍내에 가서 싱싱한 미꾸라지 한 사발 사와서 맛나게 끓이실 생각에 그저 신명나신 어머니, 팔순의 어머니에게 있어서 추어탕 한 그릇은 그저 특별한 음식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말로서 다 표현하지 못하는 특별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정성이며 향기로운 삶을 지탱하는 그녀만의 사랑방정식인 것이다. 이번 다가오는 일요일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추어탕을 먹을 것이다. 산초의 독특한 향 보다 더 진하고 구수한 내 어머니의 사랑을 소스로 넣은 추어탕을......
초등학교 시절, 우리 집 소유인 "강시기" 논 귀퉁이에는 가뭄을 대비해서 만들어 놓은 작은 웅덩이 하나가 있었는데 어른 키 두 배쯤 되는 깊이를 지닌 이 웅덩이는 해마다 벼가 누렇게 익어 갈 무렵 아버지께서 물이 수확기에 접어 든 벼농사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한 어느 날 진흙 팩을 한 미끈한 몸통을 살며시 햇살 위로 드러낸다.
물 퍼내는 일은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긴 장화 신은 아버지가 한참 동안 쉬지 않고 양동이로 웅덩이의 물을 퍼 물꼬로 쉴 새 없이 버리기를 얼마나 했을까? 이제 좀 쉬었다 하자시며 웅덩이 밖으로 폴짝 뛰듯이 올라와서는 논두렁에 앉아 담배 피는 동안 오빠는 메뚜기를 잡아 여물어 가는 벼를 뽑아 대롱에 매달 듯 끼우고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발이 저린 것도 잊은 채 새털처럼 가벼운 담배연기를 따라 눈동자 원을 그렸다.
연례행사처럼 행해지는 미꾸라지 잡이를 아버지보다도 오빠보다도 더 좋아하고 기다렸던 것은 집안에 기르던 동물들이 불쌍하다고 육식을 전혀 하지 못했던 내가 이상하리만큼 추어탕을 좋아한 이유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바닥을 드러낸 웅덩이에 들어가서 어머니 젖가슴처럼 감촉 좋은 진흙을 실컷 만지고 놀 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날 저녁 우리 집 밥상에는 토란 줄기와 부드러운 배추를 넣고 갖은 양념을 해서 푹 끓인 국에 향신료로 쓰이는 초피가루(내 고향 경상도에서는 지피라고도 하고 산초라고도 함)를 먹는 사람의 식성에 따라서 마지막에 양을 조절해서 넣어 먹는 추어탕이 단연 인기였다.
어린 시절 특별한 향내가 나면 먹어보지도 않고 애당초 거절했던 것과 달리 톡 쏘는 산초향기가 입 안 가득 쏠쏠하게 풍기는 추어탕을 제법 맛있게 먹었다. 언제부터인가 모르겠지만 내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내 작은 텃밭에 심어져 있는 3m 높이의 산초나무와 함께 산초향기를 떠올린다. 막연한 생각이지만 어머니의 성격이 톡 쏘는 매운 맛, 매우면서도 상쾌하고 시원한 산초 맛을 닮은 때문이 아닐까 한다.
추어탕에 들어가는 초피가루처럼 어머니의 팔 십 인생에도 이런 향기가 녹아있다는 생각, 추어탕을 좋아하는 음식에 대한 별난 기억과 함께 나라는 사람도 느낌 좋은 그림처럼 좋은 향기를 뿜어 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먼 훗날 어머니 연세와 같은 나이에 세상과 마주 섰을 때 내 딸이 지금의 내가 내 어머니를 기억해 낼 때 향기로운 산초를 떠올리듯 내게서 내 어머니와 같은 톡 쏘는 듯 상쾌하고 시원한 산초 향기는 아니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그림 한 장 떠올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02년 10월 04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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