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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변화가 즐거운 여자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3. 22.

내 나이 서른 중반 즈음, 두 아이 키우느라 편하다는 이유로 줄곧 바지위주로 입었던 고정스타일에서 벗어나 외출 할 일이 생기면 오랜 기간 입지 못했던 치마를 즐겨 입었다. 그것도 짧은 미니스커트나 청치마를... 외출 할 일이 생기면 치마를 거의 습관처럼 즐겨 입는 내가 못마땅해진 남편은 급기야 치마 입는 것 그 자체까지 싫어하기에 이르렀다. 남편의 불만은 아내인 나에게서만 끝난 게 아니라 어린 딸아이에게까지 그 불통이 튀어 옷을 사러 아동복 전문매장에 들르면 딸아이 원피스를 고르고 있는 나와 달리 바지코너를 기웃거리며 "이 옷 어때, 활동하기에도 편하고 보기에도 예쁘고... 괜찮지?" 하며 나와 딸아이반응을 살피며 바지 입기를 권했다.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워낙 젊은 취향의 옷을 즐겨 입는 내가 불만이었겠지만 나 역시 아담사이즈인 내 신체조건과 나이 보다 어려 보이는 얼굴에 어울리는 취향은 생각하지 않고 옷차림은 물론 머리모습까지 자신의 스타일을 은근히 강요(?)하는 남편의 관심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해되는 날도 있었지만 불편하다 느껴지는 날에는 남편의 바람을 모른 척했다.

 

그런 나였지만 남편이 좋아하는 취향의 스타일을 온전히 무시하고 살수는 없었기에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남편의 요구에 맞추려고 내 나름의 노력은 기울였다. 가령, 파마를 싫어하는 남편을 위해 결혼 생활 대부분 머리 스타일을 생머리에 가깝게 유지하려고 애를 썼고 어쩌다 내가 생활한복을 입고 다니면 "얼마나 보기에 좋아... " 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는 남편을 위해 행동하는데 다소 불편해도 몸에 베이면 괜찮아지겠지 하는 기대심리로 생활한복 입는 것에 익숙해지려고 했으며 어느 때는 55사이즈를 입는 내 몸 치수 보다 한 치수 큰 정장을 선물하며 아줌마는 좀 넉넉하게 입어야 보는 사람이 푸근하다는 자기만의 방식을 내게 주입시키는 남편을 바라보며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남편의 바람인데 못 들어줄 것도 없지 하는 마음으로 몸과 옷이 제각각 따로 인 느낌의 옷을 기분 좋게 입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작년 11월, 남편의 취향인 점잖은 스타일의 정장과 내가 좋아하는 몸에 착 달라붙는 짧은 미니스커트를 멀리한 채 간편한 복장인 청바지에 티나 잠바를 입고 외출하는 일이 많아진 후부터 옷을 입는데 있어서 많이 자유로워졌다. 덩달아 외출하기 전 옷을 챙겨 입을 때 남편이 싫어할까 혹은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볼 때 느끼는 이미지가 단아한 아름다움으로 보여 지기를 바라던 욕심도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이렇게 내 안에 작은 변화가 이루어지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기존에 다니던 수영장을 바꾸면서부터다. 일년 내내 문화적인 행사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문화예술회관과 두류도서관, 관광정보센터, 그리고 우방랜드...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런 아름다운 공간이 있다는 것만 해도 즐거운 일인데 어느 날 문득 구두와 핸드백을 던지고 등산가는 사람 마냥 작은 배낭을 메고 수영장까지 건강도 지킬 겸 걷고자 마음먹은 그날부터 특별한 볼일이 없는 한 오전 9시 30분을 전후로 집을 나서는 그 시간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걷기 시작하면서 눈에 띄게 좋아진 것은 웬만한 추위엔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몸 상태가 좋아졌고 겨울이면 만성후두염으로 고생하던 그 이전과 달리 감기로부터 거의 자유로워진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차로 움직이면 스치는 풍경이나 사물을 미처 다 바라볼 수 없는데 운동화를 신고 걸으니 느긋한 마음으로 마주치는 풍경들을 더 자세히 보고 느낄 수 있다는 게 지금의 나에겐 건강을 되찾은 것 이상으로 고맙기까지 하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어가는 사람들, 들쭉날쭉 모양도 색깔도 각각인 건물들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언제 집에 도착했나 싶을 정도로 재미가 있어 걷는다는 생각조차 잊어버릴 때도 있다. 내가 걷는 거리는 빠른 걸음으로 왕복 40분이 걸리고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알게 모르게 참견하고 다니면 1시간이 족히 걸리는 거리지만 길을 걸으며 보고 듣고 느끼는 변화가 즐겁다. 
 
걷기 시작하면서부터 오고 가는 그 시간 동안 이어폰을 낀 귀는 울리는 전화를 받거나 음악을 듣느라 바쁘고 눈은 마주치는 풍경을 보느라 쉴 새가 없지만 어느 날부터 인가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재래시장을 둘러보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되었다. 평소 손에 뭔가를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는 나는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는 재래시장이 있어도 거의 이용하지 않고 편리하다는 이유로 일주일에 한두 번 할인점을 찾아 생필품이며 반찬거리를 사러 시간을 투자했는데 수영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 때마침 점심시간인 오후 1시 전후에 시장주변을 통과하기에 언제부터인가 들르지 않고 통과하면 서운할 정도로 재래시장에 들러 뭔가를 사는 날이 많아졌다. 대부분 그날 먹을 반찬거리가 주를 이루지만 어느 새 나는 딱히 살 것이 없어도 사람 사는 소리와 사람 사는 냄새가 폴폴 풍기는 순한 된장국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재래시장을 즐거이 기웃거리는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정장을 벗고 청바지에 편한 티를 입고 다닌 후 내 나이에 어울리는 우아한 멋은 줄어들었지만 길 위를 걸으면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즐거움을 하나 둘 알아가고 있는 요즘 새로운 것에 눈을 뜬 아이 마냥 즐겁기 그지없는 나는 걸으면서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또 걷는다. 머리 위를 맴도는 새들의 힘찬 날개 짓에서 잠자고 있는 내 꿈을 기억해내고 하루가 다르게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자연에서 기다림의 미학과 희망을 엿보고 다소 시끄럽지만 지나치는 차량의 소음과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걸으면서 그들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새삼 깨달으며 어제도 오늘도 눈에 익은 그 길 위를 걷고 또 걸었다. 어제 만난 풍경과 오늘 만난 풍경 그리고 내일 만날 풍경이 내 삶 속에 녹아들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 주는 아름답고 건강한 가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2004년 3월 16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