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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마르지 않기를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3. 28.

지난 일요일, 태풍 매미의 위력에 무성하던 산수유 잎과 많은 열매가 땅에 떨어져 아직 나무 가지치기를 할 시기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침을 먹고 나무 위로 성큼성큼 올라가 톱질을 했다. 나무 형태를 살피며 잘라야 할 부분과 남겨 두어야 할 부분을 남편과 상의하며 한 참을 톱질하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오른쪽 발에 무언가 순식간에 와서 톡 쏘는 느낌이 들어 살펴보니 발이 여러 개고 털이 보슬 하게 나있는 초록색 벌레가 내 발을 물고 있었다. 근처에서 다른 나무 가지치기를 하고 있던 남편이 내 짧은 비명 소리에 얼른 다가와 벌레를 떼어 내어 주었지만 시큰거림은 계속 되었다. 원래 나라는 사람은 한번 작정하고 나선 일은 끝까지 하는 성격이라 오늘만 살고 끝낼 일도 아닌데 이쯤에서 그만 하라는 남편의 말에도 정원 잔디 속 잡초까지 말끔히 정리를 하고 난 후에야 일을 끝마쳤다. 아내라는 사람의 성격이 그러하니 남편 혼자 그만 둘 수 없었는지 벌레가 있어 잎이 갉아먹어도 계속 꽃 피워내기를 멈추지 않는 무궁화(백단심)나무와 계절을 분간 못하고 잎 사이사이에 노란빛 꽃망울을 틔우는 개나리와 오월의 여왕이라 불리는 장미가 아직도 끝을 모르고 피어나는, 정원 곳곳에 심어져 있는 나무에 농약을 분무하고 내가 톱질 해 둔 나무를 일일이 전지가위로 작게 잘라 쓰레기봉투에 버리기 좋을 만큼 말끔히 일을 처리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무에 올라가는 건 남자인 남편이 하는 것이지 불혹을 넘긴 여자가 나무에 올라간다는 건 영 마땅치 않은 일이라고 고개를 갸우뚱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기심 많은 막내딸로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나무 타기도 곧잘 즐겨 늦가을 집안에 있는 몇 그루의 감나무에 올라가 여린 나무 가지 끝에 아슬아슬하게 그네를 타듯 매달려 감 홍시를 따거나 곶감으로 만들 감을 따는 걸 아주 즐겼다. 어린 시절 대가족이 모여 사는 종가 댁 막내딸인 나는 늘 궁금증이 많아 시키지 않아도 이것저것 찾아서 했으니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남편보다 어른이 된 지금에 와서도 톱질이나 낫질은 내가 더 익숙하다. 그러니 자연히 정원나무손질이나 잔디손질은 내가 더 적극적일 수밖에... 아무튼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니라 놀이처럼 즐겁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몸에 베인 습관은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쉽사리 바뀌어 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문명의 이기를 충분히 잘 활용하면 그냥 쉽게 처리 할 수 있는 일이 수없이 많지만 나를 아는 가까운 이들이 내게 자주 하는 말, 대충해라. 늙으면 다 몸에 무리가 오는 법이라는 말을 아직도 잘 챙겨 들을 줄 모르니 시도 때도 없이 피어대는 저 장미와 개나리처럼 나도 어리석은 줄 모르고 저 잘난 맛에 사는 고독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 못 드는 이 깊은 밤에 뼈 속까지 스며든다.

 

 

자다가 문득 깨어나 남편이 깰까봐 조심스레 침대에서 내려와 침실 옆방에 위치한, 사색의 방이라 부르기 좋아하는 컴퓨터가 있고 피아노가 있고 책장이 있고 액자가 있는, 작은 베란다 너머 보이는 풍경이 그야말로 환상인 공간에 들어와 한글 97을 띄워놓고 토닥이고 있는 것도 어리석을 만큼 내 생각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일요일 독충에 물려 밤새 잠을 설치고 월요일 병원 가서 주사 맞고 약 타 가지고 온 밤에도 온 몸을 기어 다니듯 신경이 파르르 떨리고 아파 또 잠을 설쳤는데 그날따라 하필 은행이며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이 어찌나 많던지... 이래저래 삼일 동안 컴퓨터를 켜지 못했는데 잠들기 전 잠시 열어본 인터넷, 분명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내용이 있었다. 플레쉬 시집을 만든다고 시(詩) 한편을 보내 달라고 해서 보냈는데 정작 완성된 플레쉬 시집에는 내 이름만 쏙 빠지고 없었다. 8월과 9월 연이어 소설과 수필로 등단하라는 추천제의를 거절한 내가 문단차원에서 섭섭함을 넘어 이런 조치를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강하면 부러진다는 말을 지금 나는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내 생각이 옳다고 여겨 내 의지대로 행동한다고 해도 이렇듯 삶에 있어서는 때때로 복병이 숨어 있어 나를 잠 못 들게 한다.

 

 

솔직히 시인으로서 등단 할 때도 나는 기쁨보다는 초등학교 때부터 오로지 내 장래희망은 작가였던 걸 기억하는, 내 안에 잠재해 있는 또 다른 내가 무릎을 꿇은 것 같아 한없이 미안했다. 채 익지 못한 설익은 글을 가지고 신춘문예가 아닌 중앙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이유가... 글을 쓴다는 것에 의미를 두었던 것들이 하나 둘 빛을 잃을까 그게 제일 두렵다. 누구처럼 유명하고 싶지도 않고 내 죽는 날 까지 가슴에 차오른 생각과 느낌들을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나를 확인하며 살리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내가 그리도 쓰고 싶은 소설 한줄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외출에서 돌아와서도 옷부터 갈아입고 된장찌개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음식과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 몇 가지를 해서 저녁을 먹고 그 후에는 아들 녀석 숙제랑 준비물 검사며 뭐든지 최고가 되고 싶어 하는 욕심 많은 딸아이 학교 과학시간에 사용 할 지시약 만든다고 이틀 전 사다 놓은 보라색 양배추에 물을 넣고 진하게 달여 만든 지시약을 찬물에 동동 띄워 식히는 동안 보라색이 아닌 다른 색도 만들었으면 하는 아이를 위해 제철이 아닌데도 피어 있는 장미 두 송이를 밤중에 정원으로 나가 조심스레 꺾어 적은 양이지만 정성스레 지시약을 만들어 색이 변질 될 것을 우려해 먼저 준비해둔 보라색지시약과 함께 각기 다른 작은 병에 넣어서 냉장고에 보관을 했다. 이렇듯 지금 내게 주어진 또 다른 이름,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시간을 투자하는데 고마운 행복을 느끼면서도 정작 내 안에 살아 꿈틀거리는 감성과 이성을 적당히 혼합해서 내 영혼의 소리를 찾아내는 작업에는 그리 많은 시간을 투자 할 수 없어 늘 시간에 대한 갈증을 느낀다.

 

 

지난밤 자다 말고 깨어나 내 안의 나를 읽어 내린 시간들아 고맙다.

나를 가두고 나를 토해낸 시간은 내게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구속인 것을...

아,

내 안에 숨 쉬고 있는 아름다운 구속이여,

영영 마르지 않기를......

 

 

 

 

2003년 10월 01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