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각과 느낌

기억의 강과 망각의 강 사이에서 중얼거리다 - 이희숙

by 시인촌 2006. 5. 2.

어제에 이어 오늘도 집안 인테리어 작업하느라 
오전부터 건장한 남자 몇 명이 부산스럽게 오고가며 일하는 뚝딱 뚝딱 소리가

집안 곳곳에 울려 퍼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런 이유로 오늘 나는 외출도 하지 못하고 집안에서만 몇 시간째 맴돌고 있다.

집안에 낯선 사람이 있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든 신경이 쓰인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일꾼들이 작업하는 주변을 맴돌 수도 
온전히 방안에 틀어박혀 있기도 참 애매한 상황이지만 나름대로 즐기기로 했다.
즐긴다고 해봐야 아주 가끔 작업이 어느 정도 진척(進陟)이 있는지
일하는 사람들이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슬쩍 다가가 구경하는 정도거나
물이나 먹을 간식을 내어주는 정도지만 말이다.
 
처음에는 베란다 창가에 서서 오고가는 사람들과
그 날 내 기분에 따라 색다르게 느껴지는 풍경들에만 시선이 머물렀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지 못하는 곳이 없고 품지 못할 생각이 없을 정도로
보이는 것 이외의 것에도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한순간에 일어났다.
왕성한 호기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은
마침내 나와는 별 상관없게 느껴지는 소리까지 빠르게 확장해 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대략난감(大略難堪)이다.
분명 어젯밤 몇 번이고 전화를 했다는데
휴대폰 전원을 끄기 전까지 저녁시간 이후 걸려온 전화는
그 흔한 부재중 전화 몇 통이라는 표시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전화를 걸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내게로 전화를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기억 속에 존재하는 다른 번호를
습관처럼 눌러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것도 아니라면 번호를 누르는 손가락이 순간 어긋나 다른 수를 살짝 건드렸거나 
내게로 오는 전화선이 모두 비정상상태였거나...

 

어떤 이유가 진실이든 간에
어제 몇 시간 동안 내게로 향했던 한 사람의 마음이
전달되지 못한 것은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던 그 순간의 정직한 마음을
끝내 전달하는데 실패를 하고만 한 사람의 소중한 시간과
그 시간 속에 피어난 간절함이 날아간 것에 대해
따스한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은데 생각뿐,
말은 끝내 두서없는 생각을 황급히 써 내려가는 이 시간까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어제, 나와의 소통이 절실히도 필요했던 그 사람만큼이나
우리 모두는 살면서 누군가와의 소통이 간절한 순간과 종종 마주칠 것이다.
사람마다 소통하고픈 이유는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것으로부터 오는 소통의 단절에 대해서는 상당히 예민한 편이다.
그 예민함은 별안간 정전사태를 맞은 것처럼 짧은 순간에 끝날 수도 있지만
소통에서 오는 단절은 의외로 불편함 이상의 불안감마저 감당해야할 때도 더러 있다.
아무튼 전화를 했다는 사람과 전화를 받지 못한 나 사이에 기억이라는 걸 생각해냈다.
불과 수십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기억이라고 이름 부치기도 우습지만 말이다.

 

백과사전에 기억[記憶, memory]이라는 단어를 입력하면
‘과거의 경험을 인간의 정신 속에 간직하고 되살리는 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라고 명시되어있다.
사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기억이라는 이름하에
얼마나 많은 무늬를 그려내고 있는지 알지 못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기억하는 만큼 망각하는 능력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망각하는 능력이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힘이 되던 
현실 속에서 겪는 고통, 불안, 상처까지도 사라지게 하는 치유능력까지 지녔던 간에
사는 동안 누구 할 것 없이 기억과 망각사이를 넘나들며 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눈에서부터 들어온 사월이 가슴속에서 향기를 품고 살다 떠나는 오늘도
나는 기억의 강과 망각의 강을 습관처럼 수도 없이 건넜는지도 모른다.
아, 오늘 나는 아름다운 기억 몇 개를 가슴에 새기는 이유로
아름다운 기억 몇 개를 잃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2006년 04월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