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누군가와의 대화에서 평생 사랑할 기회와 성공할 기회는 세 번 온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기억이 난다. 너무 오래전 기억이라 당시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에게 오는 행운을 잘 알아차리고 기회가 그냥 흘러가지 않도록 뭐든 열심히 하자는 뜻에서 주고받은 거로 기억하고 있다.
우연이겠지만 내 인생에서도 사랑할 기회는 세 번 주어졌다. 그런데 세 번의 기회 중 한 번의 기회만 내 온 정열을 다해 그 기회를 잡았을 뿐, 상대방을 향한 열정을 어디까지 쏟아내어야 좋을지 몰라 두 번의 기회는 나 자신이 만든 벽에 의해 뿜어낼 수 있는 열정의 절반도 투자하지 못했다. 그런 이유로 우습게도 나는 첫사랑을 누구와 했는지조차 기억이 없다. 스쳐 지나가는 얼굴은 있어도 내 가슴을 흔들어 놓았거나 불을 지폈다는 사실에 대해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동의하기란 참 쉽지가 않다. 그래서인지 아주 가끔 추억의 골짜기를 거닐 때, 내게도 정말 가슴 떨리는 파릇한 첫사랑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에 싸이곤 한다.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 내게 찾아온 사랑할 세 번의 기회 중 어떤 사람과의 짧은 만남은 사랑이라고 착각했을 뿐 사랑이 아니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고 또 다른 한 사람과의 만남은 오래전 드라마 제목처럼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 ’ 하는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했고 사랑이라고 명쾌하게 대답하는데 머뭇거리게 하는 채워지지 않는 1% 요인이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하는 의문부호 하나를 풀어야 할 숙제처럼 가슴에 새기게 했다.
어쩌면 나는 내게 찾아온 세 번의 사랑할 기회로 인해 오늘의 행복한 내가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서툰 사랑과 설익은 사랑을 통해 성숙한 사랑을 할 기회를 얻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파릇한 추억을 들추어봐도 진정 사랑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람은 16년 차로 사는 남편이라는 사실에는 추호의 거짓도 없다. 그런데도 내 인생에서도 사랑할 기회는 세 번 주어졌다는 사실에 대해 아니라고 말할 염치는 없다.
고여 있는 물도 흐르지 않으면 썩기 마련이고 돈도 돌고 돌아야 경제가 발전하고 스치는 바람도 한 곳에 머물지 않아야 자유롭듯 좋은 것은 움직인다고 했다. 좋은 것은 움직인다는 그 누군가의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사랑도 움직이는 거라고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사람의 일평생을 통해 진실로 사랑이었노라 이름 붙일 수 있는 사랑은 한 번이면 충분하고 한사람이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그렇다는 말이지 21세기를 사는 오늘의 현실과 동떨어진 논리에 맞장구치며 사랑은 하나라고 마침표 찍듯 속 시원하게 역설할 생각은 없다.
영원히 사랑할 것 같은 사람들도 헤어지고 영원히 살 것 같은 사람들도 어느 날 자고 나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사람은 누구 할 것 없이 모순을 품고 산다. 우리 사는 동안 이런 모순덩어리가 어디 생사(生死)의 문제와 사랑과 이별에 관한 문제뿐이겠냐 마는 살며 사랑하는 동안 사랑으로 인해 아프고 사람으로 인해 상처를 받아도 사랑하며 살 일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 꽃피는 오월에는 사랑하고 볼 일이다. 바다를 꿈꾸는 너의 입술에 붉은 포도주 같은 내 입술을 열어 숨길 수 없는 사랑을 별처럼 쏟아내고 볼 일이다. 꽃피는 오월에는.
2006년 05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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