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깊고 낮은 읊조림

깊고 낮은 읊조림(여든 일곱) - 이희숙

by 시인촌 2006. 5. 18.

생각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인생에서 특별한 경험이요,
행운이라는 걸 살면서 수도 없이 느끼고 확인하고 싶은 게 사람이다.
특히 살아가야 할 이유가 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더욱 그렇다.
오늘 나는 내 인생에 있어서 아주 특별한 한사람을 슬프게 했다.
그래서 오후 내내 두통과 안타까움에 시달려야했다.

 

불현듯 찾아드는 정리할 수 없는 감정들로 인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을 가슴속을 유영하던 말들을
기어이 세상 밖으로 내보내고야 말았다.
이미 내 입에서 산산이 흩어져버린 말들을 두고
그 순간 내 가슴이 오작동을 일으켰노라 변명 아닌 위로를 해보지만 
정작 내 자신의 모난 부분만 들킨 것 같아 은근히 자존심이 상한다.

 

나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고 달라야 한다고 다짐했는데
나 역시 별수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끓어오르는 감정을 매끄럽게 다듬지 못했다는 사실과
내 감정이 이러하니 더 많은 관심과 이해를 필요로 한다는 간접전달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배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점이
이 밤 나를 외롭게 한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때때로 상대방이 말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을뿐더러
미루어 짐작하는 오만 또는 편견의 우를 범하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이의 말을 걸러서 이해하는 능력도 부족하다.
나 역시도 예외는 아니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원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때도 있지만
정반대의 말이나 행동을 할 때도 더러 있다는 것을 남자들은 모르는 것 같다.
남자들은 평생 여자마음을 두 번 모른다는데 결혼전과 결혼 후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결국 남자들은 여자들의 마음을 평생동안 모르고 산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아무튼 살면서 누구나 생각하고 느낀다고 해서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 자신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을 마음껏 행동할 수 없게 만든 내 안의 벽이
오늘만큼 참을 수 없었던 적은 없었다.

 

사람들은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 것 같다.
아무리 행복한 사람도 아주 가끔은 철저하게 혼자이고 싶어하고
저만의 꿈을 꾼다는 사실을...
나도 아주 가끔은 견고한 나를 해제시키고 싶어하는 순간이 있다.
그런데 너는 벽처럼 단단하니까 하는 식으로 미루어 짐작하는 사람들로 인해
언제나 나는 단정해야 하고 야무져야 하고 정도를 벗어나면 안 되는 연습을 해왔다.
아니, 연습 이상의 철저한 습관으로 살아왔다.
그것으로 인해 99%의 행복은 얻었지만 1%의 외로움은 벗어날 수가 없었다. 

 

공자는 ‘논어’에서 마흔살을 무엇에 마음이 홀려 헷갈리지 않는 나이라는 의미로
불혹이라 이름 붙였지만 현실 속에서는 그렇지가 못하다.
어쩌면 나는 그 나이에 접한 사람들이 겪을 심리적 위기를 이미 공자는 알고 있었기에
예방차원에서 그런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정신과의사 정혜신씨는 “중년은 자기 자신을 뼈저리게 발견하는 시기다." 라고 했으며
에비게일 트래포드는 자신의 저서 <나이 듦의 기쁨 중에서>
‘꿈은 제2의 사춘기에 필수적인 요소다.
꿈을 꾸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경험과 감정의
새로운 영역을 탐색할 수 있는 자유를 의미한다.
정신을 확장시키고 새로운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이기도 하다.
또한 발견의 과정이자 자신의 한계를 다시 설정할 수 있는
내면의 여행이기도 하다.’라고 했다.

 

오늘 나는 불혹(不惑)이 유혹(誘惑)의 늪으로 빠지는
인생의 변화를 가져다주는 시기인가 하는 문제는 뒤로하고도
사추기(38살에서 45살 사이)에 속한 내 모습에서 제2의 사춘기를 발견한다.
진짜 사춘기를 경험하는 나이와는 사뭇 다르겠지만
이유 없이 밀려드는 정리할 수 없는 감정의 굴곡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