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오전임에도 부산발 서울행 KTX는 빈자리를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이 타고 있었다. 동대구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 동안 어쩌면 옆자리에 아무도 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하게나마 품고 있었던 기대가 여지없이 무너지는 걸 확인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창가인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얼마 후 이리저리 좌석 번호를 찾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자신의 몸집보다 더 크게 보이는 커다란 가방을 좁은 통로로 들고 오는 게 힘겨웠는지 몇 번이고 가방을 놨다 들었다 했다. 그 모습을 보니 짐이라고는 달랑 어깨에 메는 작은 가방 하나밖에 없는 내 어깨가 더 가볍게 느껴졌다. 그렇게 처음 대면한 내 옆에 앉은 젊은 여자는 한 번도 KTX를 타본 경험이 없는지 무거운 가방을 다리에 올려놓고 온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댔다. 보다 못한 나는 앞사람의 의자 뒤에 있는 상을 빼서 그 위에 올려놓으면 좀 편안할 것이라고 그녀만 들을 수 있는 정도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내 말에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지만 내 말대로 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했는지 무릎 위에 올려두었던 가방을 상위에 올려놓았다.
음악이라면 장르를 불문하고 부르는 것 이상으로 듣는 음악을 좋아하는 나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외출할 때면 MP3를 필수품처럼 귀에 꽂고 다니는 걸 즐긴다. 그런데 청바지나 주머니가 있는 바지나 치마를 입었을 때와 달리 주머니 없는 하늘거리는 치마를 입고 외출한 지난 금요일은 화장품이랑 지갑 등 잡다한 걸 넣은 가방이 살진 돼지처럼 볼록해 보여 휴대전화마저 가방에 넣어야 할 상황에서 음악을 듣지 않을 때 MP3까지 작은 가방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한 번쯤은 음악 없이 외출하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MP3를 집에 두고 왔는데 막상 음악 없이 좁은 공간에 앉아있으려니 꿈의 열차라는 KTX도 빠르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무료하다 싶을 즈음 가방에 넣어둔 휴대전화에 진동이 느껴졌다. 앞뒤 옆 할 것 없이 빈틈없이 앉아있는 기차 안에서 할 수 있는 말은 그리 많지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바라다본 창밖 풍경은 하루가 다르게 짙어지는 녹색으로 인해 보기만 해도 산뜻했으며 간간이 부는 바람과 그림자가 만든 공간으로 인해 나무나 건물들은 빠르게 스치는 기차 속력과 맞물려 다소 몽환적이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몽환적이라는 표현이 다소 무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바람과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 내는 순간의 모습들은 정말이지 그렇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내 자신이 창 밖 풍경을 보며 몽상가처럼 혼자 노는 동안 기차는 대전역에 다다랐다.
대전역을 출발한 기차는 묵묵히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었고 가방에 넣어둔 휴대전화는 심심하지 않을 만큼 몇 번 더 울어댔고 내 옆에 앉은 그녀도 나도 내리지 않은 상황은 계속 되었다. 기차 안에서 1시간 30분을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내 옆에 앉은 그녀와 나는 그 흔한 ‘어디까지 가세요. ’라는 물음 한마디 주고받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사이에서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지만 기차에서 내려 마중 나온 사람을 만나기 전까지 왠지 나도 그녀도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갈 때와 달리 올 때 기차 안 풍경은 사뭇 시끄러웠다. 좌석 표에 적힌 자리를 찾아가니 사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있었다. 다소 어색했지만 내 자리라는 걸 알려주자 그 남자는 활짝 웃는 얼굴로 "일어서고 싶지 않은데... " 말끝을 흐리면서 몸은 일어서고 있었다. 창가인 내 자리로 들어가기 전 가벼운 목례를 하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시선을 창가로 옮겼다. 자리에 앉은 지 3분도 채 지나지 않아 그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대전가세요? 아니면 대구? 무슨 일 하세요?..." 대답할 생각도 없었지만 대답할 시간도 만들어주지 않고 혼자 이야기하는 그 남자가 짧은 순간 연극배우가 무대 위에서 대사를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처음 본 낯선 남자에게 시선을 마주한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든 어색하거나 불편하기 마련이다. 이런 생각은 비단 나만이 갖는 건 아닐 것이다. 하여, 나는 뭐가 그리도 궁금한 지 계속 말을 거는 그 남자를 향해 오래도록 시선을 똑바로 향하지 못했다. 그 남자가 바나나주스를 세 개 사서 건너편에 앉은 동료로 보이는 남자와 나에게 내밀기 전까지, 몇 번이고 사양하는 내가 바나나주스를 싫어한다고 생각했는지 오렌지 주스로 바꾸어 친절하게 막대까지 꽂아 건 내준, 이름도 성도 모르는 낯선 남자의 성의를 계속 거절하자니 내 자신이 별일도 아닌데 너무 벽을 쌓는 것 같아 결국 고맙다는 말을 하고 주스를 받아들었다.
간간이 울리는 전화를 받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내가 대답을 하건 말건 간에 일방적으로 내게 말을 거는 그 남자는 앵무새처럼 똑 같은 말을 반복했다. "대전가세요? 아니면 대구? 무슨 일 하세요?..." 뜻하지 않은 상황에서 별 생각 없이 대구라고 대답한 내게 그 남자는 대뜸 대구사람들은 왜 그러냐며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십 년 이상 내가 살고 있는 도시의 사람들을 함께 묶어 좋지 않다는 투로 말하는 그 남자의 말에 더 이상 침묵으로 일관 할 수가 없어 "대구 사람들이 왜요?" 정색을 하고 물었다. 그렇게 시작한 대화는 5월 31일에 치른 선거결과, 즉 많은 국민들이 선택한 당과 사람을 자신도 선택했지만 다른 당과 너무 많은 차이가 나는 대구사람들의 선택에 대해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흥분한 이유를 알게 했고 그 남자가 내린다는 대전이 가까워 올 무렵에는 직장과 소소한 일상, 나이까지 알게 되었다.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바빠 일요일도 쉴 시간이 없어 아내와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그 남자는 결혼 17년 동안 잘살고 있는 아내를 만난 것도 기차 안이었다며 18년 전을 거슬러 올라간 아내와의 인연을 들려주었다. 나는 구전동화를 들려주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는 아이 마냥 어느 순간 그 남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었지만 솔직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상의 느낌은 없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떤 이로부터 평범한 느낌 이상의 감정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그 남자는 왜인지는 몰라도 자꾸만 자신의 신분을 나에게 노출시켜라 애썼다. 선한 인상의 그 남자는 대전이 가까워지자 자신이 입고 있는 점퍼 왼쪽 가슴에 적힌 직장상호를 가리키며 이름이 특이해서 기억하기 쉬울 거라며 인터넷에 쳐보면 나와 있을 거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남자가 내게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18년 만에 처음이었다는..." 말과 거의 동시에 손을 내민 그 남자의 행동이 너무도 뜻밖이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악수하기를 주저하고 있는 내게 반가웠고 즐거웠다며 인연이 있다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겠지요. 라는 말로 거듭 악수하기를 원했다. 내민 손을 부끄럽게 해야 하나 아니면 내리고 나면 금방 잊혀 질 사람이니까 모른 척 하고 내민 손을 잡아줄까 짧은 순간 이럴까 저럴까 고민 아닌 고민을 하다 내려야 할 시간이라는 그 남자의 말에 불쑥 내민 손을 잡고야 말았다. 기차 안에서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흔치 않는 일인데 낯선 남자와 악수까지 한 나는 그 남자가 대전역에서 내리고 난 후 더러 잊고 사는 내 나이를 기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든다는 게 때로는 편안해질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름도 성도 알지 못하는 사십대 초반이라는 그 남자가 내리고 나서 사람과 사람사이에 친밀함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은 친구라는 이름으로 우정을 쌓아 가는 사람도, 연인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도, 수십 년을 함께 산 부부도 처음에는 모두 모르는 남남으로 살아온 사람들이었지만 누군가 먼저 마음의 문을 열어 시작한 만남은 상대의 마음이 열리고 닫힘에 따라 친밀한 관계로 남을 수도 있고 스쳐 지나가는 사람으로 남을 수도 있다는 인간관계에 대한 꼬리를 문 생각들은 마흔을 넘긴 지금까지 내게 닿았던 몇 몇 특별한 인연들과의 각기 다른 첫 만남을 떠올리게 했다. 뜻밖의 상황으로 인해 친밀함(Intimacy)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기차는 종착역인 동대구역에 도착했고 짧은 몇 시간의 외출은 그렇게 끝이 났다.
2006년 06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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