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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학 개론

즐길 수 있어야만 성(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이희숙

by 시인촌 2006. 6. 7.

 

마흔을 넘긴 여자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는 이야기란

하지 못하는 이야기가 없을 정도로 솔직하고 당당하다 못해 뻔뻔하기도 하다.

언젠가 친구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대뜸 일주일에 부부 관계는 몇 번 정도 하느냐는 말로

일순간 다른 대화를 제치고 기선을 제압했다.

친구들 대부분이 나와 비슷한 이십 대 후반에 결혼했으니 새삼 흥미로울 일도 아니겠다 싶지만,

성(性)에 관한 이야기는 나이를 불문하고 사람의 마음을 묘하게 긴장시키는 뭔가가 있어서인지

다들 눈빛은 사춘기 소녀 마냥 그 말을 이끌어 낸 친구의 얼굴로 쏠렸다.

어떤 친구는 상황에 따라 다르니 말할 수 없다는 친구도 있고

어떤 친구는 직장을 다니니 피곤해서 귀찮다는 친구도 있었지만

그 자리에 모인 절반 이상의 대답은 이틀에 한 번 정도이며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라고 했다.

허물없는 사이에서 나온 대답이니 별 오차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부부 사이의 성관계 횟수와 만족도가 일본 다음으로 낮다는

언젠가 읽은 어느 조사기관의 수치와 상당히 거리가 먼 것 같다.

솔직히 ‘성(性)은 즐거운 것이다.’ 라는 명제를 두고 이야기할 때

결혼한 사람 중 그렇지 않다고 반대의견을 내놓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간혹 드라마 상에서도 엿볼 수 있지만, 그토록 토닥토닥 싸우던 사람도

몸 사랑을 하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화해하는 걸 보면

몸 사랑은 단순한 배출기능을 벗어나 둘로 나누어져 대립하던 생각마저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까지 조율할 수 있는 최고의 명약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적인 사랑보다 몸 사랑이 우선한다는 말은 아니다.

균형 있는 식사를 골고루 했을 때 몸이 건강하듯

결혼한 부부 사이에서는 정신적인 사랑이든 몸 사랑이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는 게

그날 모인 친구들의 한결같은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성(性)은 즐거운 것이다. 즐길 수 있어야만 성(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2006년 06월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