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5월 31일, 친정아버지 기일이라 밤기차를 타고 부산오빠네 집에 갔다가
두 시간 남짓 자고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대구 우리 집으로 돌아온 이후로
며칠째 내 정성과 관심을 필요로 하는 일들이 다른 여느 때와 비교해 볼 때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함에 제대로 쉴 수 있는 날이 거의 없었다.
정신력으로 버티어 온 몸은 어느 순간 한계에 다다른 모양새로 몸 여기저기를 공략해댄다.
사실 지금 나는 아픈 몸보다 정신이 무너지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지도 모른다.
생각 따로 몸 따로 오늘은 참으로 많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든다.
피곤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내 몸은 나약해진 정신에게 경고하듯
머리에 열을 끓게 하고 온 몸이 무겁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마흔이라는 나이를 살아내기까지 내가 만들고 지켜 온 정신은 지층처럼 두꺼워
쉬 부서질 것 같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 나는 유월의 한 낮 뙤약볕에 머리 조아리고
드러누운 풀잎과도 같이 내 그림자를 베고 누워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
자신을 한발 물러서서 바라본다는 게 이런 느낌이란 걸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그동안 나를 들뜨게 하고 설레게 했던 많은 것들로부터 거리를 두어야겠다는 생각과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여전히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는 것들을 바라보는 느낌이란
무거움과 슬픔 그 중간의 감정인 것 같다.
어찌 보면 이런 감정은 사치일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배부른 사치일 것이다.
하루 정도 푹 쉬어볼까 생각하다 스스로에게 기꺼이 양분이 되어주겠노라 다짐하며 집을 나서 길 위에 섰다.
차로 움직이면 5분이면 족할 거리를 청바지에 운동화를 신고 삼십 분을 투자해서 도착한 수영장,
이미 수업시간은 끝이 났다.
평소 운동량인 이천 미터에 훨씬 못 미치는 천 미터를 돌고 내 몸은 항복을 선언했다.
몸살기운에 온몸이 으스스 추워지는 게 장난이 아니었다.
사우나도 하지 않고 가볍게 샤워만 하고 서둘러 수영장을 빠져 나오는데
그날따라 유독 수영장 주변 아름다운 공원 곳곳에 바퀴를 멈춘 채 서 있는 수백 대의 자동차행렬에 시선이 갔다.
걷다 말고 일시 정지된 태엽처럼 걸음을 멈춰 주변을 돌아보니 비어있는 벤치가 없을 정도로 육 십 세 이상의 노령인구와
일시적 혹은 장기적으로 경제력을 상실한 삼 사 십대 실직가장들이
오후 1시를 전후한 시간에 표정 없는 얼굴로 앉아있었다.
그들 중에도 희망을 찾아 신문에 나와 있는 깨알 같은 글씨를 정성껏 읽어 내리는 모습도 보였지만
대부분 상실감에 허우적대는 사람처럼 아예 벤치를 장악해 두 팔과 두 다리를 뻗고 눈감은 채 무료한 시간과 싸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대한민국의 현실인가 싶은 게 왈칵 북받치는 감정에 나도 몰래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순간, 내가 무슨 배부른 감정의 유희에 머물고 있는가 싶어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미안한 생각마저 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몇 날 며칠 지쳐있던 몸에서 새로운 세포가 생성된 듯
몸과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는 걸 느끼며 빠른 걸음으로 집을 향해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살짝 스치며 "어, 멋있는데..." 라고 말하지 않는가
못들은 척, 부딪히지 않은 척 지나치는데
"어디까지 가세요?" 라는 제법 정중한 말투가 귓가를 울렸다.
그 누구와 눈 마주칠 필요도 없고 표정을 들킬 이유도 없는
선글라스 안과 밖 원리를 이용해서 걷는지 한곳에 머물러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내 가까이 서성대며 따라 걷고 있는 그 남자를 흘낏 바라보았다.
말쑥한 정장차림에 조금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의 삼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남자는
그 시간 왜 그곳에 있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반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공원 곳곳에 주차해 놓은 수백 대의 차량들과 삼삼오오 늘어져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다.
그랬구나.
그 남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챙하고 울리고 지나는 동안 시리도록 푸른 기운을 느꼈던 건
어쩌면 그 남자도 무료한 일상에 갇혀 버린 노예처럼 서서히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 속에
부표처럼 떠 있는 하나의 섬으로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공원을 벗어나는 동안에도 공허한 남자의 목소리는 좀체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등 뒤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남자의 목소리가 오후 한낮의 열기를 삼키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2004년 06월 09일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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