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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그냥 뜨겁고 진한 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었어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6. 25.

 

언제였더라.
처음 본 남자가 내게 눈이 화려하게 예쁘다며
불쑥 CD 한 장을 건 내고 달아나듯 서둘러 길 건너편으로 사라진 게...
그 날 바람은 좀 불긴했어도 봄이었던 걸로 기억해.
바람결에 묻어오는 꽃향기가 코끝을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그저 기분 좋은,

햇살이 참으로 포근한 날이었지 아마도...

 

그 남자 모 신문사에 다닌다며
내게 詩 한편을 달라며 메일주소를 가르쳐 주었지.
물론 난 거절했고...
그 후로 그 남자 또 한 번 마주쳤는데
이번엔 책 속에 연극티켓을 주었지.
맹자, 논어, 대학, 중용 뭐 그런 것들과 친숙한 
한문에 해박한 지식을 갖춘 그 남자는 어떤 측면에서 보면
제 흥에 겨워 사는 기인 같아 보였어.

 

그 남자를 잘 알지도 못하지만
두 번의 스치듯 만난 느낌이 아무튼 그랬어.
안개 같은 그 남자가 이야기해준 신문사로 전화를 했더니
분명 그 남자가 그곳에 있었고 무지 반갑게 전화를 받더라.
나를 기억해 주는 그 남자한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무튼 그 남자의 말이 진실일까 하는 호기심은 솔직히 있었나봐.
그렇지 않고서야 전화할 이유가 없잖아.

삶 속에서 사랑의 등불 환하게 비추고 있는 남편이 있는데...

햇살 좋은 창가에 앉아서 생의 전부를 건,
사랑 혹은 죽음을 노래한  "Gloomy Sunday"를 들은 오늘
그냥 뜨겁고 진한 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었어.
모습도 잘 생각나지 않는 남자지만
순식간에 건 낸 CD를 듣는 날이면
오래 전 내 삶 속에 그런 풍경 하나가 있었다는 생각을 해.

 

Heather Nova가 부른 GLOOMY SUNDAY는 정말 환상 그 자체였어.
1935년 레코드로 발매된 당시 8주만에 헝가리에서만 이 노래를 듣고 187명이 자살했고
작곡자 레조세레스는 연인을 잃은 아픔으로 이 곡을 작곡하지만
1968년 겨울, 그도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며 고층빌딩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지.


그 남자, 오늘도 여전히 신문사 책상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겠지.
어쩌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의 나처럼
불현듯 친구도 되어 주지 못한 나를 기억해내며 씁쓸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지.

 

"Gloomy Sunday"를 들은 오늘
그냥 뜨겁고 진한 커피 한잔이 마시고 싶었어.
이 시간, 나만의 세상에 갇혀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오늘 난 봄 햇살에 취한 거야.
감미로운 음악과 상관없이......

 

 


2004년 어느 봄날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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