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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아내도 여자다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7. 17.

살면서 종종 내가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십대 초반이란 걸 잊을 때가 많습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내 자신 어느새 중년이라는 생각, 실감나지도 않을뿐더러
중년이라는 이름은 내게 있어 아직도 까마득히 먼 나라의 일인 양
단 한 번도 진지하게 중년이라는 나이를

가슴으로 느껴본 적이 없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그 누군가 지나치다 이 글을 읽으면 코웃음 치며 비웃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어쩌겠어요.

제 타고난 습성이 그런걸...  


며칠 전, 남편과의 외출에서 원피스라고 하기에는 어쩐지 한눈에 와 안기는 느낌이 

이브닝드레스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입으면 몸매가 다 드러날 것 같은 검정원피스를 보고

"나, 저 옷 입으면 예쁠 것 같은데 자기 생각엔 어때, 살까?"
"안 돼."
"왜 안 돼? 나한테 딱 어울릴 것 같은데..."
"저런 옷은 비싼 팬티 자랑하려고 입는 여자들이나 입는 거야."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황당한 소리냐고요.
아, 글쎄 이 남자가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바로 난데
그 말을 들으니 어째 참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비싼 팬티를 자랑해, 여자들이... 혼자 입안에서 말을 굴리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내 남자라 불리 우는 이 남자와 눈 마주친 연애시절부터 거슬러 올라가 결혼해서 지금까지

만15년 동안 단 한번도 속옷을 선물로 받은 기억이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 이름으로 된 예쁜 집도 사주고 백화점에 가면 나는 살까말까 망설이는 명품가방에
마음에 드는 옷이 있으면 물 건너온 옷이라도 사주곤 했던 사람이
유독 속옷은 남자가 껄끄럽게 라는 이유를 내세워 한사코
"희야가 사면 안 돼?... 돈 줄까?..." 이러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하루는 큰마음 먹고 썩 내켜하지 않는 남자 달래고 얼러서
여성전문 속옷매장으로 함께 갔지요. 
도착한 그곳에서 내 마음에 드는 속옷 몇 벌을 골라서
어떤 게 예쁘고 좋아 보이는지 대신 골라달라고 했지요.

내 남자라 불리 우는 이 남자,
영 서 있는 장소가 불편한지 눈을 어디다 둘지 몰라 쩔쩔매는 사람처럼
내 뒤에 엉거주춤 서서는 빨리 마음에 드는 걸로 직접 고르라는 시늉을 하고는
내가 들어서 보여주는 것을 정확하게 바라보는지조차도 잘 읽어 내릴 수 없는 표정으로
아까 그것보다는 이게 더 나아 보이네 하는 정도의 관심만 보여주더군요.

 
현모양처가 꿈인 여자도 때때로 감성적인 여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
비단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입니다.
아름다운 선율이 흐르는 레코드가게를 지나치면

얼굴도 이름도 가물거리는 사람들이 불현듯 떠올라 지금쯤 뭘 할까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우연히 길을 걷다 쇼 윈도우에 보기 좋게 옷을 걸치고 있는 마네킹을 보면
예고 없이 불쑥 가게 안으로 들어가 마음에 드는 옷이나 속옷을 즉흥적으로 사기도하고
풍경 좋은 곳을 지나치면 그저 말이 없어도 사랑하는 둘이라는 그 이유만으로도
마냥 좋았던 순수한 시절을 떠올리며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데
아직 약속장소에 나오지 않은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도 싶은,
수줍은 시절의 기다림의 미학을 다시 한 번 온몸으로 느껴도 보고 싶고
아이들이 잠든 깊은 밤, 패션쇼 하는 사람처럼

남편 앞에서 새로 사온 옷이나 속옷을 입고 예뻐, 이 정도면 섹시해 등등...
연애시절처럼 자신이 이 세상 그 어떤 여자보다 괜찮은 여자로 다시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아무튼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속옷 사는 일만은 늘 내게 전담하고 싶어
슬그머니 꽁무니 감추는 남편에게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속옷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날 또 한번 지나가는 말로 슬쩍 던졌지요.
그날 내 입에서 먼저 그 말을 꺼낸 이유는 언젠가 그 언젠가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남편이 내생각하며 기쁜 마음으로 직접 고른 속옷을 손수 입혀주는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결혼 13년 차로 살아오는 동안 내 말이면 거의 다 들어주는 남편이
유독 여성들이 많이 찾는 미장원이나 속옷코너를 기웃거리는 자체를 싫어해
딱 한번 그 고집을 꺾어보고도 싶다는 이상한 심리와
우연히 그날 수영장에서 몇 몇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
(십 몇 만원 하는 속옷을 모 백화점에서는 몇 만원에 한정 세일한다는...)가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처럼 맞물려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내 시간에 맞춰
다소 늦은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른 남편과 마주 앉아 식사하는 도중 

"오늘 수영장에서 사람들 모 백화점으로 많이 쇼핑 갔다."
"왜?"
"십 몇 만원 하는 속옷이 세일한정 판매해서 육 칠 만원에 판매하고 있다고 사러간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여자들은 참 이상해."
"뭐가 이상해?"
"꼭 그렇게 비싼 속옷을 입어야 하는 거야.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남편은 영 못마땅한 듯 고개까지 흔들어댔습니다.
그날 식탁에서 점점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뜨거워졌지요.
"여자들은 참 이상해. "
"뭐가?"
"속옷이 훤히 다 보이는 겉옷을 입고도 뭐가 그리 좋은지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잖아."
"개성시대에 입는 것도 다 자기선택이지 뭐."
"그래도 그렇지. 정말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민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냐."
"하긴, 흰색 바지나 치마에 가지각색의 무늬가 훤히 다 드러나 보이는 속옷을 입은 여성을 지나치면 여자인 내가 괜히 민망할 때도 있긴 해."
"그렇지. 보기 싫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시면서 끊어진 이야기를 다시 꺼낸 사람은
남편이 아닌 바로 저였습니다.
다시 사무실로 가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아내도 여자라는 사실을 내 남자에게 상기시키고 싶은 이유로 인해...

"아내도 여자야. 그러니까 때때로 야한 속옷도 입고 싶고 섹시한 포즈도 취하고 싶은 거야. 그게 여자야.
솔직히 만약 내가 누구처럼 불거져 나온 살을 조금이라도 감추기 위해서 
몇 십 만원에서부터 백만원이 훌쩍 넘는 기능성 속옷을 맞춰 입어야 하는 신체조건이거나
개미허리로 연출하기 위해서 많은 여성들이 한번쯤은 입어 봄직한
몇 만원 하는 거들을 꼭 입어야 하는 신체조건이라면 어떻겠어.
마음이 고와야 여자지 라고 다들 말들 하지만 보기 좋은 게 좋다고
여자든 남자든 솔직히 예쁘거나 멋있거나 행동이 여자답거나 남자다울 때 더 끌리는 거 아냐.
특별히 살을 빼야 한다는 소리 듣지 않아도 되는 나 같은 여자하고 사니까
자기는 잘 모르는가본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자는 여자고 아내도 여자야."

 

며칠 전, 남편과의 외출에서 검정원피스를 사고 싶어 하는 내게
왜 하필 남편은 잊고 있었던 비싼 팬티이야기를 불쑥 꺼냈는지...
지금 생각해도 참 우스운 일이지만 더 우스운 건 그날 그 풍경 속에서
중얼거린 제 자신이었다는 것 아닙니까.
무슨 소리냐고요.
이 세상에 단 한 벌뿐인 나만의 맞춤속옷은 입지 않아도
속옷을 꽤나 까다롭게 골라 사 입는 나로서는
나름대로 속옷을 잘 입는 여자라는 생각하고 있던 터라  
나도 비싼 팬티 입는데...
아, 내 중얼거림에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지만
아무튼 시간이 흐른 지금도 그날 남편과 주고받은 비싼 팬티생각만 떠올려도
괜스레 얼굴이 간지러워집니다.


솔직히 나라는 사람은 내가 가진 많은 것의 이름에게 충실하기를 원합니다.
아내이기 이전에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 하는 순간에는
자상함과 포근함이 몸과 마음 곳곳에 우러나오기를 바라고
여자라는 이름으로 존재할 때에는 여자라서 아름답다는 광고 문구처럼
여자로서의 감각이나 감성이 살아 숨쉬기를 바라고
아내라는 이름으로 존재해야하는 순간에는 내조를 잘하는 것 이상으로
남편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또 부부로서의 몸사랑에서도 함께 즐거움을 구하는
적극적인 자세로 아내이자 여자로서의 자리를 기쁘게 소화시킬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랑하는 가족을 생각하며 앞치마를 두르고
오늘은 무슨 음식을 해 먹을까 고민하는 그 순간에도
아내라는 이름을 인생 길 귀한 보석으로 알고 살아가는 많은 여성들은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습니다.
비싼 옷과 세련된 화장으로 자신을 치장하지 않아도
자신 속에 몰래 감추어진 여자로서의 감성을 남편이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잘 살아가고 있는 여자도
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서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마저도 문득 문득 잊고 지낸다는 여자들도

어느 순간에는 모두 자신이 여자임을 잊지 않는 아름다운 여자로 살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글을 쓰는 저라는 여자는 어떤 사람이냐고요.
저야 물론 여자라서 행복해요 라는 광고 문구처럼
내게 이름 붙여진 많은 것들 중
특히 내가 여자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여자, 여자, 여자지요.

 

 

 

2004년 07월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