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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읊조림(아흔 여덟) - 이희숙

by 시인촌 2006. 10. 29.

가끔 혼자 있는 시간이면 거실 소파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들고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내가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곤 합니다.
온유한 생각에 둘러 쌓여 있다 보면  
넓은 창을 통해 보여지는 풍경, 이를테면 하늘, 나무, 꽃, 새, 지붕...
그것들을 빛나게 하고 살아있게 하는 햇살, 바람, 비...
그리고 우리 집 주변에서 들리는 크고 작은 소리들까지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고 
어느 것 하나 살아있음이 경이롭지 않은 것이 없어 
숨쉬고 말하고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그 모든 것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이 밤,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바라보는 세상은 아니지만 
사색의 방 너머 발코니 창을 통해 보여지는 세상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우방타워랜드 불빛에 두 눈을 고정시키고
갓 내려 따끈따끈한 커피 한 모금을 음미하듯 입술근처만 살짝 적셔봅니다.
진한 커피 향과 따스한 느낌이 몸과 마음에 남아있던 긴장마저 사라지게 합니다. 
긴장이 사라져서인지 절로 눈이 감깁니다. 
눈감은 세계에는 낮 동안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놀리던 나는 없고
그 자리에 낯설지 않은 또 하나의 나, 그녀만 있을 뿐입니다.
그녀가 들고 있던 커피 잔 속에 
실루엣처럼 드리워진 앞산 그림자가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헬 수 없이 많은 별들도 줄지어 퐁당퐁당 뛰어듭니다.
웃을 때마다 하얗고 고른 치아가 매력적인 그녀의 웃음소리도 
커피 잔 속에 스며든 지 이미 오래입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녀가 마시는 커피는 줄어들어 이내 바닥을 보이겠지만 
마음 속에는 그녀를 미소짓게 하는 것들로 하나 둘 채워질 것입니다.
어쩌면 그녀는 지금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게 아니라 
그녀 안에 숨쉬는 감성을 마시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소리는 내지 않아도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분명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웃는 그녀가 무척이나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랑스럽다는 생각을 하자 
그녀 안에 있던 사랑이 사랑에게 말합니다.
신은 사랑하는 능력과 행복해야 할 권리를 누구에게나 주셨지만
사랑을 지키는 능력과 행복을 누리는 권리를 아무에게나 주지 않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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