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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당신이 곁에 있어 오늘 하루도 맑음입니다

by 시인촌 2006. 11. 4.

어제, 아니 아직 잠들지 않았으니까 오늘이라고 해 두자.
오늘은 여느 날과 달리 아침을 먹은 후 운동하러 가는 대신에  
문화 큰 잔치를 연다는 아들 녀석의 학교로 갔다.
고학년이라 그런지 참석한 학부모들이 적어 안타까웠지만
태권도 시범과 방언연극을 하는 아들녀석을 지켜보며 
언제 저리도 컸을까 하는 마음에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내 마음은 즐겁기만 했다.
국화꽃이 만발한 교정 곳곳을 거니는 기분은  
아이들의 생각이 담겨져 있는 시화전을 감상할 때 최고조로 달했는데
마냥 어리다고만 생각했던 아이들의 마음 속에 
어찌 그리도 많은 생각주머니가 있었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아이들의 눈 높이를 그대로 이해 할 수 있게 잘 표현한 두 편의 글 앞에서는
마치 내가 심사위원이라도 된 듯 한참동안 그 자리를 뜨지 못했는데
하루를 마감하는 이 늦은 시간에 낮 동안 접했던 아이들의 마음 속 생각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창 밖 풍경처럼 어둠 속에서 아른거린다.
내 동생은 무서운 영화는 잘 보면서 내가 화만 내도 금새 울보가 된다는 내용과   
시험을 망쳤을 때, 부모님께 꾸중을 들었을 때, 아플 때나 심심할 때 
그렇지 않았던 이전의 시간으로 시간여행을 하고 싶다는 내용은 
고놈 참 귀엽네 하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가을 햇살이 곱게 내리쬐는 운동장 곳곳에 마련된 잊혀져 가는 우리 것,
이를테면 널뛰기, 투호, 굴렁쇠 굴리기, 비석 치기 등은 
어린 시절 함께 뛰어 놀던 친구들과 부모님, 흐르는 속도만큼 빠르게 잊혀져 가는,
생각 속에서조차 만나지 못했던 , 
얼굴마저 가물거리는 잊혀진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는 가교역할을 했다. 
덕분에 과거와 현실 사이를 넘나드는 추억여행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오후 어느 한순간 내 생각에 오작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지금 나는 잠들지 못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내 행동에 대해 반성하고 있다.

굳이 그 순간 내가 왜 발신번호 표시제한 전화를 해 
스스로 당황해하는 일을 했는지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새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나는 생각한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다짐을 한다. 
더 이상 오늘과 같은 행동은 두 번 다시는 하지 않겠노라고... 
오늘 전화사건만 아니었다면 
내 하루는 그야말로 내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는 시간들로 이루어졌었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간,
내 삶의 노트에 오늘을 산 느낌을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생각하다 
한때 흐렸으나 대체로 맑음이라고 썼다.
그러나 그 표현은 어쩐지 어색하다.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자 어떤 행동을 하기 위해 선뜻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사람처럼
내 마음 속 곳곳을 산책하듯 눈을 감고 다시 거닐어본다.
오늘 하루 동안 나를 미소짓게 한 일들을 찾아...
지금으로부터 5년 전, 결혼 10주년을 기념하는 석혼식 때 
웨딩촬영을 하자고 제의한 남편의 안을 어찌 어찌하다보니 놓쳐버렸기에
결혼 15주년을 맞은 올해, 결혼기념일인 봄날은 지나갔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잘 살아온 그동안의 시간들을 축하하며 
앞으로 더 열심히 행복하게 살자는 뜻으로 웨딩촬영을 하기로 했다.
결혼이 유독 많은 11월이라 2주 후에나 촬영을 할 수 있겠지만 
웨딩촬영을 하겠다는 예약을 한 어제(11월 3일), 아니 오늘은 
내 삶의 노트에 이렇게 써야 제대로 일 것 같다.
당신이 곁에 있어 오늘 하루도 맑음입니다.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