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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낮은 읊조림

읊조림(아흔 아홉)

by 시인촌 2006. 11. 5.

오후 5시30분쯤 청바지 뒤 호주머니에 넣어두었던 
휴대전화 진동이 느껴져 꺼내보니 발신자는 남편으로 되어있다.
"저녁 먹었어?"
"옷 사려고 하는데 55사이즈면 되지?"
"지금 어딘데?"
"밀레오레"
"거기는 왜? "
"애들(시누 아이 둘, 시동생 아이 하나) 옷 사 주려고? 내 옷도 사고..."
잠시 말을 머뭇거리다가 
" 성○(시누)도 옷 예쁘다는데..."
"거긴 괜찮은 거 없잖아, 메이커가 뭔데, 얼마 하는데?"
"가격은 왜 물어?"
오늘, 나이키 신발 사러 가기로 약속했다가 
아침 먹고 일찌감치 도서관에 공부하러 간 딸이 그 무렵 돌아와 가까이에 있었기에 
전화소리를 대충 알아듣고 전화기에다 대고 큰소리로 외친다.
"아빠, 내 신발, 나이키 사와요."
그런데 남편은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아마도 내 말에 화가 난 모양이다.
아니면 내가 있을 때도 그렇지만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부모 형제에게 뭐라도 다 퍼주고 싶어 하는 성격을 내게 들켜버렸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무튼 남편은 옷을 사 가지고 갈게라든지 
딸아이 신발 사이즈가 얼마지 하는 물음 없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결혼 16년 차로 살고 있는 동안 내 자신이 시댁식구들에게 관대하면 
이 세상에서 이런 남자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자상한 남자지만
시댁식구들의 행동 중 고쳐야 할 것이 있다고 판단해 이야기하면 
"가족이니까 안 보고 살 수 없으니 희야가 참아..."  라고 세뇌교육을 시키는, 
그래서 어지간한 일로는 평생 싸울 일 없는 부부지만 
그런 순간과 맞닥트리면 
나처럼 행복한 사람 나와 봐 하고 큰소리치던 게 무색할 정도로 
은근히 나로 하여금 고민에 빠지게 한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아이들도 아빠의 행동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지라 
“아빠, 오늘 돈 꽤나 쓰겠네...”  라고 말한다.
자기가 열심히 노력해서 경제를 창출했으니 만나서 수 십 만원을 쓰던 그 이상을 쓰든 
내가 뭐라고 일일이 말하기도 뭣하지만 
같은 자식인데도 유독 남편과 내게만 요구사항이 많은 시아버지를 보면 참 할 말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가능한 시댁에 관한 한 벙어리로 사는데 익숙하다.
왜냐하면 효자인 남편이 원해서이기도 하지만 
내 사랑하는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서로에게 싫은 소리하며 
얼굴 붉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방금 동대구에 도착했다는 남편의 전화가 왔다.
돌아오는 남편의 손에 내 옷이 들려있을지, 딸아이의 나이키 신발이 들려있을지, 
아들 녀석과 자기 옷만 들려있을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남편이 딩동 하고 대문 벨을 누르는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고 어떤 말로 맞아야 할지를 고민한다.
아니, 내 자신에게 다짐을 한다.
환한 표정을 지을 것, 선물을 주면 고맙다고 말할 것, 
결혼식장에서 만난 시댁 쪽 친척들은 모두 잘 지내느냐고 안부를 물을 것,
몇 시간 전 내 전화에 서운했다고 말하면 미안하다고 말할 것 등...
지금 이 순간 나는 생각한다.
어릴 적 내 별명이 야시였던 것처럼 오늘도 지혜롭게 잘 넘기겠노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