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향기

비가 내리니까 별게 다 생각이 난다 - 이희숙

시인촌 2005. 7. 12. 02:42

열어둔 베란다 창을 통해 비 내리는 모습을 보니까
엄마가 너무 보고싶다.
엄마를 내 가슴속에서 단 한번도 떠나 보낸 적 없는데
사는 게 바쁘다보니 더러는 잊혀지고 더러는 묻혀진 사람처럼
그렇게 엄마의 존재를 순간, 순간 기억해내지 못한 것 같아 정말 미안해.
그래도 나,
사랑했던 엄마를 기억해낼 수 있는 더운 체온은
엄마가 살아 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내 몸과 마음 곳곳에 똑 같은 깊이로 흐르고 있음을
지금 이 순간에도 느낄 수 있어.

 

 

지난달 초,
엄마랑 아버지 찾아뵈러 우리 식구 모두 합천에 갔었는데
엄마도 알고 있어?
우리보다 하루 전날 도착한 오빠식구는
엄마의 부재가 여기저기 느껴지는 종가 집 곳곳을 두루 살피며
청소도 하고 텃밭에 채소도 심고 고장난 수도도 고치고 그랬는데...
엄마,
사람은 가고 없는데 심어둔 부추, 방아, 가죽, 앵두는 왜 그리 잘됐는지 몰라.
올케가 챙겨준 것들을 집으로 가지고 와서 펼쳐보니까
가슴이 서늘해지는 게 참 많이도 아팠다.
그래서 혼자 비 맞은 뭐처럼 중얼거렸지.
사람은 가고 없는데, 사람은 가고 없는데 하면서...
 

 

엄마,
기억나.
초등학교 들어가서부터 나 사투리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거...
친구들은 할머니를 할매라 불렀는데 나만 할머니라고 불렀고
고구마를 친구들이 고매라고 부를 때 나는 고구마라고 불렀던 거...
그래서인지 지금까지도 사투리를 사용하지 않는 내게 
많은 사람들은 내 고향이 경기도나 위쪽 지방이라고 짐작하며 물어봐.
고향이 합천이라고 대답하면 모두들 놀라.
그러면 난 남편고향이 서울이라 어느 정도 영향은 있겠죠. 하고 웃고 말아.

 

 

비가 내리니까 별게 다 생각이 난다.
어머니 소리가 나오지 않아 늘 엄마라고 불렀던 것과
아빠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아 늘 아버지라고 불렀던 것도 생각나고
생각 속에서는 나 아직도 참 어린데
중학생 딸과 초등학생 아들을 둔 사십대 초반을 살아가는 여자라니

이 순간만큼은 실감이 나지 않아.
나, 엄마한테 응석을 부리고 싶은가봐.
알잖아.
막내는 원래 애교가 많은 거.

 

 

엄마,
어제는 우리 집 두 아이 시험도 끝났고 해서
모처럼 홀가분한 마음으로 식구모두 고속열차 타고
시동생 딸인 신영이 첫돌 잔치에 다녀왔어.
모 그룹 자동차설계 디자이너로 근무하고 있는 시동생이
지난 4월부터 짧으면 6개월, 길면 1년 예정으로 미국연수중이라
조금은 아쉬운 자리였지만
오랜만에 함께 모인 서울 시댁 친척들과의 만남은 좋았어.


 

엄마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한 시간
내게 있어서는 엄마를 좀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기에 좋았어.
이제 졸리려고 해.
나, 잘래.
다음에 또 살아가는 이야기 들려줄게.
안녕...

 

 

 


 
엄마,
근래 찍은 사진 보여줄까?
엄마가 살아생전 막내딸을 마지막으로 만났던
같은 해인 작년 오월,
문학제 같다가 그 누군가한테 찍힌 사진과

 

 

 
 
여름 초입에서
은행볼일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내가
집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않고
햇빛을 가리기 위해서 쓴 선글라스를 그대로 쓴 채 
정원 한켠에 서성이는 걸 본 신애가 놓치지 않고 찍은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