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도 여자다 - 이희숙
종종 중년의 나이에 접어든 사십 대 초반이란 걸 잊을 때가 많습니다. 실감 나지도 않을뿐더러 중년이라는 이름은 아직도 까마득히 먼 훗날의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남편과의 데이트 도중 입으면 몸매가 다 드러나는 이브닝드레스 같은 느낌의 검정 원피스를 보고
"저 옷 입으면 예쁠 것 같은데 살까?"
"안 돼."
"왜? 나한테 딱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저런 옷은 비싼 팬티 자랑하려고 입는 여자들이나 입는 거야."
이 무슨 자다가 봉창 뜯는 황당한 소리냐고요. 이런 소리를 하게 만든 장본인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인데 막상 그런 말을 들으니 어째 참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연애 시절은 물론이고 결혼해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남편한테서 속옷 선물을 받은 적 없다는 사실이 괜스레 서운하더라고요
내 이름으로 된 예쁜 집도 사주고 쇼핑 가면 살까 말까 망설이는 것도 잘 사주는 사람이 속옷은 껄끄럽다는 이유를 대며
"희야가 사면 안 돼? 돈 줄까?"
그래서 하루는 큰맘 먹고 내켜하지 않는 사람을 데리고 여성 전문 속옷매장으로 갔지요. 마음에 드는 속옷 몇 벌을 골라 어떤 게 예쁘고 좋아 보이는지 대신 고르라고 했더니 내 뒤에 엉거주춤 서서는 아까 그것보다는 이게 더 나아 보이네 정도의 관심만 보여주더군요.
아무튼 남편에게 다시는 이야기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속옷에 관한 이야기를 어느 날 지나가는 말로 슬쩍 던졌지요. 내 말이면 잘 들어주는 남편이 유독 여성들이 많이 찾는 미장원이나 속옷상점을 기웃거리는 자체를 싫어해 한 번만이라도 고집을 꺾어보고 싶다는 생각과 그날 수영장에서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하는 이야기가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운동 마치고 집으로 오는 시간에 맞춰 늦은 점심을 먹으러 온 남편과 식사 도중
"수영 끝나고 모 백화점으로 많이들 쇼핑 갔다."
"왜?"
"십만 원도 더 하는 속옷이 육칠만원에 세일한정 판매하고 있다고 사러 간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여자들은 참 이상해."
"뭐가 이상해?"
"꼭 그렇게 비싼 속옷을 입어야 하는 거야. 보여줄 것도 아니면서"
남편은 영 못마땅한 듯 고개까지 흔들어댔습니다.
그날 식탁에서 점점 우리 두 사람의 대화는 뜨거워졌지요.
"여자들은 참 이상해."
"뭐가?"
"속옷이 훤히 다 보이는 겉옷을 입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잘 다니잖아."
"개성시대에 입는 것도 다 자기 선택이지 뭐."
"그래도 그렇지. 정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어."
"하긴, 그럴땐 내가 다 민망하더라.."
"그렇지. 보기 싫지."
"아내도 여자야. 나도 가끔은 야한 속옷을 입고 싶을 때 있어. 마음이 고와야 여자라고 하지만 보기 좋은 게 좋다고 여자든 남자든 솔직히 예쁘거나 잘생겼거나 멋있는 사람한테 더 끌리는 거 아냐. 특별히 살 빼지 않아도 되는 나 같은 여자하고 사니까 자기는 잘 모르는가 본데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여자는 여자고 아내도 여자야."
검정 원피스를 사고 싶어 하는 내게 하필 남편은 잊고 있었던 비싼 팬티 이야기를 불쑥 꺼 냈는지 생각만 해도 참 우습지만 더 웃긴 건 그날 그 풍경 속에서 중얼거린 나 자신이었지요. 속옷을 꽤 까다롭게 골라 사 입는 나로서는 나름대로 속옷을 잘 입는 여자라는 생각을 하던 터라 ‘나도 비싼 팬티 입는데...’ 아, 내 중얼거림에 듣는 이 없었지만 그 생각만 하면 괜스레 얼굴이 간지러워집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오늘은 무슨 음식을 해 먹을까 고민하는 여자도 자리에 어울리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애쓰는 여자도 사는 게 바쁘고 힘들어서 여자라는 사실마저도 잊고 지낸다는 사람도 참 괜찮은 사람으로 사랑스러운 여자로 인정받기를 바란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글을 쓰는 나라는 여자는 어떤 사람이냐고요. 여자라서 참 좋은 주체적인 여성이지요.
2004년 07월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