읊조림(마흔 셋) - 이희숙
지난 가을, 우연히 걸려온 한 통의 전화
남자 : "여보세요. 은선씨전화 아닌가요?"
여자 :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남자 : "죄송합니다."
똑같은 질문과 똑같은 대답을 하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끊는 전화는
가을의 우수를 껴안은 채 깊은 겨울을 넘기고 화사한 봄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치 반복되는 학습을 잊지 않고 해야하듯 한 달에 한 두 번 전화를 걸어
자신이 찾는 여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고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끝으로 수화기를 내리는 남자...
예고 없이 걸려오는 남자의 전화를 별다른 동요 없이 받아들고는 앵무새처럼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를 반복하는 여자...
수화기 너머 아주 짧은 시간에 느껴지는 삼십대 중반의 목소리 주인공은
잊어버렸는가 싶으면 전화를 걸어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를 반복하는 여자에게
은선이라는 여자의 이름을 기억하게 한다.
그 남자가 그리도 애타게 찾는 은선이라는 여자에게
한번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그 여자는
사무실 전화인지 집 전화인지 알 수 없지만
자신의 존재를 발자국처럼 선명하게 남긴 남자의 전화번호와
목소리에서 그 남자가 서울남자라는 사실과
은선이라는 그녀를 무척이나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만다.
지금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전화번호가
한때 은선이라는 여자의 휴대전화번호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아무튼 그 여자는 아니라는데 왜 또 전화했어요...라는 말 대신에 오늘도 예외 없이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고는 휴대전화의 뚜껑을 닫아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그 남자의 상실감을 이해한다는 듯 예의를 갖춰...
따지고 보면 예의라고 할 것까지도 없지만...
어쩌면 그 남자는 익숙한 거리를 걷듯
가슴 한켠에 각인된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
오늘도 똑같은 말을 습관적으로 반복하는지도 모르겠다.
"여보세요. 은선씨전화 아닌가요?"
남자의 기억 속에 존재하고 있는 은선이라는 그 여자를
놓치지 않으려고 발버둥쳐도 기억이란 놈은
어느 순간 손에 쥔 모래알이 스르르 빠져나가는 것처럼
하나 둘 소리 없이 빠져나가 마침내 그 남자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
.
오늘 나는 불규칙적으로 걸려오는 전화로 인해
한동안 잊고 있었던
내가 쓰다만 소설 속 인물들을
현실인양 살아 움직이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은선이라는 여자를 애타게 찾는 남자의 전화로 인해
목련과 벚꽃과 개나리가 분별 없는 사랑을 하는 포즈로 뒤섞여 피어있는
이 아름다운 봄밤에...
오늘 밤 나는‘비밀의 화원(바람꽃)’속을 거니는 사랑스러운 수희가 되어
문호도 만나고 석호도 만날 것이다.
어쩌면 내친 김에 더 달려
‘천년의 바람’ 속을 거니는 혜미와 민우와도 반가운 해후를 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