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향기를 따라 - 이희숙

지난 토요일 산수유축제 구경하려고 88 고속도로를 달렸다. 대구를 벗어난 지 얼마쯤 되었을까? 도로변에 노란 개나리가 피어있고 산에는 진달래도 듬성듬성 피어있다. 해 질 무렵에서야 구례군 산동면으로 접어들었다. 면소재지를 따라 피어있는 노란 산수유를 보면서 산동 마을에 대한 지명이름과 이 마을에 산수유가 왜 많은지에 대한 이야기를 두 아이에게 들려주었다. 그러는 사이 아기자기하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작은 마을 풍경이 눈에서 마음으로 쏙 들어왔다. 농약사, 철물점, 한약방, 신발 가게, 방앗간, 교회 등

 

지리산 주변으로 여행을 올 때면 주로 물이 좋다는 지리산 온천 호텔을 이용하지만 이번에는 3주 전에 미리 예약한 송원리조트에 짐을 풀었다. 짐이라고 해봐야 여행용 가방 하나와 작은 아이스박스뿐이지만...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온천욕을 한 덕분에 한결 더 뽀송한 얼굴로 상위 마을을 향해 가는데 일신각 근처에서 전국미술인 스케치 행사가 한창이다. 논에는 한가하게 풀을 뜯는 흑염소와 캔버스에 노란 산수유를 그려 넣는 사람들이 한낮의 봄볕을 즐기고 있었다. 관광휴양지 마을인 산동면 상위 마을은 특산품인 고로쇠약수와 한봉, 토종닭, 흑염소, 산수유를 팔아서 생업을 꾸려가고 있는 동네로 마을 전체가 노란 꽃봉오리에 갇힌 듯 시선 닿는 곳마다 노란색 물결이다. 개울가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산수유나무와 활짝 핀 산수유꽃이 아름다운 돌담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나들이객 모습이 정말 아름다워 보였다.

 

상위마을에서 지리산온천지구까지 불과 1~2km의 거리지만 나들이 차량으로 인해 오 분 거리가 한 시간은 족히 걸렸다. 힘겹게 빠져나온 도로 위에 햇살이 눈이 부시다 못해 은빛 날개 짓을 한다. 산등성이가 눈처럼 하얗게 피어있는 그림 같은 마을에 차를 세웠다. 죽정 마을이다. 복사꽃과 매화, 산수유가 마치 한 폭의 수채화를 그려놓은 듯한 마을에서 나도 꽃 인양 설레는 봄을 즐겼다.

 

다시 차는 구례군에서 하동 포구를 따라 19번 국도를 달렸다. 갑자기 배가 아프다는 아들 녀석 때문에 윤이주가 유배를 당하는 불우함을 잊기 위해 대구에서 구례를 찾아와 말년을 은둔할 심산으로 지은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 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뜻을 지닌 토지면의 운조루(雲鳥樓)를 들르지 못하고 화개장터에 갔다. 따뜻한 날씨 덕분에 화개장터가 제법 시끄럽다. 김동리 소설의 ‘역마’의 배경이며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로 더 유명한 화개장터는 4월 중순쯤 새로운 모습으로 매일 장이 열리게 될 막바지 준비에 한창 바빴다.

 

갑자기 짝꿍(남편)이 "희야, 좋아하는 갤러리 있네." 한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보이지 않아 잘못 봤나 하는데 1km 정도 더 가니 왼편에 ‘갤러리 섬진강 옛이야기’가 있다. 저번 겨울에 왔을 때는 왜 보지 못했을까? 보고 싶은 마음에 마음이 급하다. 한참을 달려 그곳으로 되돌아왔다. 절구와 돌탑, 수레, 물레방아, 독, 쟁기와 표정이 제멋 대로인 조형물과 꽃이 묘하게 조화를 이룬 입구를 지나 실내로 들어서니 조용한 여인 둘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칡즙을 시켜놓고 실내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영호남 화합의 교류장소로 문인이나 화가, 서예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토산품도 팔고 차도 파는 휴식과 문화 공간을 겸한 곳이었다. 차를 마시며 천천히 江山 朴六喆님의 작품 몇 점을 편안한 마음으로 감상한 뒤 2층으로 올라가 문짝 문살에 부쳐놓은 서예 두 점 ‘참 좋은 인연, 구름에 달 가듯이’ 가 이곳 갤러리 섬진강을 잘 표현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오는데 주인장이 부른다. 컵이든 그릇이든 마음에 드는 걸로 두 개 가지고 가라고 해서 하회탈목걸이를 선택했다. 해마다 가을에 열리는 안동하회탈춤 축제에서 사가지고 오는 나무재질이 아닌 흙에 유약 발라 구워낸 목걸이를 아이들 목에 걸어주니 좋아서 뽀뽀를 퍼붓는다.

 

박경리 원작의 ‘토지’ 무대가 되었던 하동으로 향했다. 지난겨울 남해 갔다가 무주리조트 가는 길목이라 들러서 먹었던 재첩국과 덮밥을 한 번 더 맛보기 위해서 진짜 원조라고 소문난 집을 찾았다. 식사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한산하다. 재첩국과 덮밥, 빙어튀김을 주문했는데 입맛이 까다롭기가 여간 아닌 우리 가족은 빙어튀김은 다 먹었지만, 재첩국은 겨우 몇 술 뜨고 남겼다. 커피 한잔 마시고 남해고속도로에 들어서니 차량이 꼬리를 물고 아이들은 피곤했는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산수유 향기를 따라 찾아간 봄은 섬진강 칠 십리 길 구비 구비에 피어 나를 취하게 했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살과 꽃향기에 취하고 여행하는 도중에 만난 후한 인정에 취하고 늘 같은 온도로 사랑을 전하는 짝꿍에게 취해 버린, 술 한 잔 마시지 않고도 온 마음으로 취해 버렸다. 사랑이라는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2001년 03월 27일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