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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유의 계절)

소설 은유의 계절(10) - 이희숙

by 시인촌 2005. 5. 7.

♧ 일요일 오전, 몇 달 전부터 자기 처제를 소개해 주겠다고 민우에게 언제 시간이 가능할지 말만 하라고 조르는 최 과장의 성화에 못 이겨 결국 민우의 집과 가까운 장충단 공원 옆 신라호텔커피숍에서 사범대를 나와 모 중학교에서 국어선생님을 한다는 최 과장의 막내처제를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민우는 괜한 짓을 한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슬그머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도 최 과장의 체면을 생각해서 며칠 전 맡긴 양복을 세탁소에서 찾아왔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꼭 새신랑 같다는 느낌에 민우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약속시간은 아직 삼십 여분 남아있었다. 신라호텔로 접어드는 길로 들어서자 간혹 민우 곁을 지나치는 자동차는 몇 대 있었지만 걷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텔커피숍 파크뷰에 들어서자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어서 오라고 손을 번쩍 들어 보이는 최 과장이 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봐도 단아한 모습의 여인이란 걸 한눈에 알 수 있는 최 과장의 처제가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푸른 남산의 자연경관과 인공폭포의 멋진 조화를 감상할 수 있는 창가에 자리는 마련되어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여인은 다소곳한 모습으로 일어서더니 두 손을 앞으로 여미고 미소를 띠우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어서 오게, 아직도 약속 시간이 되려면 십분은 더 있어야 하는 걸 보니 우리가 너무 일찍 왔나 보네. 서로 인사들 하지.

얘기한대로 우리 회사 김 대리인 김 민우씨, 막내 처제 화영이, 아니 화영씨 라고 해야 되겠지, 이런 자리에는..."

최 과장은 자기가 말을 해 놓고도 어딘가 멋 적다 싶었는지 금방 말을 바꿨다. 민우와 화영이는 간혹 최 과장의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 별말이 없었다. 화영이는 아까 전부터 녹색계열로 차분하면서도 산뜻하고 아름다운 대리석의 실내장식과 심플한 집기류에 자꾸 눈길이 머물렀다.
그런 그녀의 옆모습을 슬쩍 바라보던 민우는 오래전 아카시아 향내가 작은 시골마을을 감싸던 오월 어느 날, 스치듯 지나친 인연의 그림자를 보았다. 수줍은 듯 달아나던 그녀의 얼굴이 앞에 앉아있는 화영의 모습과 오버랩 되어 민우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기분을 억지로 참고 있었다.    
 

최 과장은 약속이 있다면서 커피 한잔을 마시고는 이내 일어섰다. 일어서는 최 과장에게 민우는 엉거주춤한 상태로 일어서서는

"좀 더 있다가 가시죠? 벌써 가시면 전..."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는 민우에게 최 과장은 나가면서 한쪽 눈을 찡긋해 보였다. 잘 해보라는 뜻이라는 걸 알지만 민우는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 오랜 시간 그토록 그리워했던 그녀 혜미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은 이미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

   

다음날 회사에 출근한 민우를 최 과장은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 나오라는 눈짓을 한다. 복도 끝 직원휴게실로 들어가자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다짜고짜

"김 대리, 우리 처제 어땠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줄 수 있겠나?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대답은 간단할수록 좋네."

순간 민우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머릿속이 텅 빈 수수깡처럼 멍하기만 했다. 최 과장은 답답하다는 듯 몇 마디 내뱉고는 휑하니 등을 보인 체 총총히 사라졌다.

"싫지 않으면 자주 만나봐, 선남선녀가 만나는데 누가 뭐라고 말할 사람도 없으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