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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의 뒷모습 운은 우연히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나중에야 이름 붙여지는 것 나는 늘 잘될 거라고 생각했다돈이 없어도 앞날이 보이지 않아도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별일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그 믿음이 어디서 왔는지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어린 시절 사랑으로 가족을 지킨 부모님과 나를 믿어 준 사람들이 있었으므로세상이 두렵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심은 줄 알았던 씨앗이내 발로 디디고 선 이 길을 만든 줄 알았는데넘어진 나를 일으켜 준 눈길과 따뜻한 말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먼저 건너와 있던 사랑들이비로소 눈에 들어온다 운은 내 몫과 남의 몫 사이에 있으며 나를 비켜 간 것들의 이름이다 갈림길에서 가지 못한 길을 돌아보며그곳에 머물고 싶은 후회가 발목을 잡을지라도오늘이라는 거친 하루를 잘 건너다보면문득, 바람이 잔.. 2026. 10. 16.
실종 실종하고 싶다는 마음은가장 나를 아끼는 순간에 오는 건지도 모르겠다 오늘, 문득 그런 순간이 있었다 아지랑이처럼 아른거리는 무언가미치도록 나를 휘어 감는 그 순간실종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눈 덮인 안데스산맥아무도 나를 부르지 않는 곳발자국마저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그곳에서사흘 밤낮 꿈꿀 수 있으면 좋겠다돌아오지 않아도 좋을 만큼 이상하리만큼황홀하도록 어여쁜 동경 어쩌면 나는사라지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한 번쯤 온전히 나이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2004년 01월 27일 - 喜也 이희숙 2026. 10. 6.
안쪽 너머 아름다운 것은오래 바라보지 않아도눈에 들어왔다 언젠가부터 이상하게도페인트 벗겨진 벽 틈으로 희미한 낙서가지우다만 동물처럼 걸터앉아 있다 비에 젖고 햇빛에 바랜 것들 가만히 바라보면무늬 사이로 그림이 생긴다 갈라진 틈 사이로 버려진 것들이를테면 찌그러진 냄비나 짝 잃은 신발 같은물건이라는 이름 대신 무엇으로 불리던 그 모서리마다 고여 있던 시간들 문득그것이 지나온 생을 생각한다 낡은 것은아름답지 않은 것이 아니라바닥을 건너온 생,저마다의 시간을 품고 있는 것 바깥으로 향하던 마음을 거두고이제야 낡은 것의 안쪽그 너머를 바라본다 2026년 10월 5일 喜也 이희숙 2026. 10. 5.
가을 가을에는 말없이 걸어도 좋고오래된 골목을 바라봐도 좋고대답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걸어도 좋고잊었다고 생각했던 이름을 떠올려도 좋다 오래된 골목에는저녁 먹으라 부르던엄마의 목소리 들릴 것 같고 가로등 아래에는맞잡은 손 놓기 싫어한참을 서성이는젊은 연인들이 서 있을 것만 같다 가을하고 말하면누군가 등 뒤에서“응”하고대답해 줄 것만 같아 그냥 왠지 그래 2026년 9월 30일 - 喜也 이희숙 2026. 9. 30.
시간의 속내 담벼락 석류나무주먹만 한 얼굴들이때를 기다린다 도무지 그칠 줄 모르던 더위도한낮의 영광으로 그치고 저녁이면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사람들 사이로 손 내민다 짧은 생저 몸속 어딘가 뜨거운 것 하나제 생을 다할 날 기다리고 있다 익어간다는 것은달리던 걸음에멈출 준비를 하는 일 2026년 9월 - 喜也 이희숙 2026. 9. 21.
작은 틈 하나쯤 9월은 경계에 서 있는 달뜨거움과 서늘함 사이바쁨과 멈춤 사이 그리고 그 틈에 잠깐 앉아 있는 사람 아침부터 저녁까지 입에 달고 사는 말 "짬이 없어" 하지만 짬은 시간이 남아서가 아니라바쁜 하루 사이에서겨우 만들어내는 것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지나가는 바람을 느끼며내가 어디쯤 왔는지 잠깐 돌아보는 시간 행복은 아무리 바빠도해야 할 일들 사이에서나를 잊지 않고 챙기는 것 오늘, 지금, 바로 여기서 계절과 계절 사이처럼우리에게도 작은 틈 하나쯤... 2026년 9월 - 喜也 이희숙 2026. 9.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