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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비밀의 화원)

소설 비밀의 화원(26) - 이희숙

by 시인촌 2006. 7. 29.


복도 끝 창가에 기대어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수희는 오랜만에 만난 허 검사가 불쑥 그녀 얼굴 가까이 수첩을 들이다 민 어느 날의 일을 기억해냈다. 기억은 그렇게 가끔 예고도 없이 엄습할 때가 있다. 불현듯 마주친 기억이 바로 앞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여겨져 수희는 머리를 흔들었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형섭은 적당하게 웨이브 진 수희의 긴 머리가 일순간 바람결에 찰랑거리는 거로 생각했다. 멀리서 봐도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은 형섭은 최대한 발걸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때문인지 수희는 형섭이 지나치는 것도 끝내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소망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그녀 수희가 나에 대한 완전한 무장해제(武裝解除)를 마음으로부터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어색한 침묵을 깨트리는 자리에서 받은 충격은 뜻밖에 컸다. 그날 이후 수희는 세뇌교육을 받은 사람처럼 허 검사를 떠올릴 때마다 완전한 무장해제라는 말을 버릇처럼 입속에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매번 똑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졌다. 살면서 단 한 번이라도 완전한 무장해제를 마음으로부터 한 적이 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없었다. 사랑이라든가 그리움이라든가 하는 건 머리로 하는 게 아니고 가슴이 허락하는 대로 움직이는 거라는 걸 푸른 이십 대에 이미 알아버렸음에도 그녀는 살면서 자신을 완전히 무장해제(武裝解除)하는데 언제나 서툴렀다. 생각해보면 두려워서도 아니고 자존심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결론은 언제나 그녀 자신을 꼭꼭 숨기는 데 급급한 사람처럼 행동했다. 애당초 자신을 보호한다는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이유만으로 자신을 위로하기에는 뭔가 어설픈 구석이 남아있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부분이 남아있음을 그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용기가 없어서도 아닌데 매번 마침표 찍기 두려운 사람처럼 머뭇거리는 자신과 마주치는 순간이면 적당한 온도, 적당한 거리, 적당한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것들과 영영 이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 계속

 

 

 


- 喜也 李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