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생각에 토요일 아침부터 마음은 한껏 부풀어 오른 오색찬란한 풍선이 되어 어디론가 두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한 발 내딛는 낯선 여행자의 행복한 걸음걸이가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만남에 대한 기대는 함께 뮤지컬 ‘FAME’을 관람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경쾌한 다장조의 음표들로 들떠 있었다. 그녀와 볼 뮤지컬 FAME을 약속 이틀 전에 미리 전화예매나 인터넷 예매를 해야 했는데 뜻밖의 상황이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구로 오는 열차 표를 끊었다는 연락을 받고 예매해도 늦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정작 표를 끊었다는 연락을 받은 후에는 전화예매도 끝나고 인터넷 예매도 끝나 버려 현장예매밖에 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녀와 약속한 토요일 오전 시간을 수영장이 아닌 뮤지컬 관람할 장소인 시민회관주변에서 보내야만 했다.
매표소 창구 문이 열리지 않은 시간에 도착해 주변을 서성이는 사람은 나 이외에도 여럿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매표소 앞 계단에 앉아 창구직원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젊은 남녀의 모습에 자연스레 눈길이 머물렀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길이 참으로 다정해 보이는 젊은 남녀를 바라본 그 짧은 시간 내 마음은 서둘러 길 떠나는 나그네가 되어 내 안에 파도처럼 치솟는 열망들 때문에 다양한 감정의 기복을 경험했던 푸른 이 십 대를 찾아 현실 속 나이를 넘고 넘어 기억의 골짜기를 더듬더듬 거슬러 올라갔다. 생각만 해도 가슴 뛰고 눈부셨던 푸른 청춘을 찾아 헤매던 마음은 눈치 없는 전화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따스한 마흔의 나이로 다시 돌아왔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고 근처에 있는 대구역으로 전날 예매해 둔 서울로 돌아가는 밤 열차(KTX)표를 받으러 갔다. 표는 내 손에 쥐어져 있는데 그 시간까지도 여전히 뮤지컬 표를 구매하지 못한 나는 시민회관 매표소 창구로 서너 차례 전화연결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응답이 없음에 너무 일찍 나온 탓이라고 위로하며 대구역사 건물에 있는 롯데백화점에서 이른 오전부터 계획에도 없는 쇼핑을 했다. 그날 분명 계획에 없던 쇼핑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충동구매는 아니었다. 진작부터 여름옷을 사려고 생각했는데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그날 생각했던 것이 이루어졌을 뿐,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내 손에는 여전히 뮤지컬 표는 없었다.
약속장소로 나가기 전에 뮤지컬 표를 끊어야 한다는 생각과 토요일이라 학교에서 일찍 돌아올 아이들 생각에 점심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서너 차례 시간을 확인했다.정말이지 그때까지만 해도 내 기분은 적당하게 불어대는 산들바람처럼 상쾌했다. 시간이 흘러 평온하던 토요일 낮이 엉망이 되기 전까지는, 가족 누구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 너무도 순식간에 일어난 6월 4일 토요일 점심 무렵에 일어난 사건, 그 일로 인해 가족 모두가 아끼고 마음 주었던 진도견인 백구(수놈)를 잃어버렸다. 아니, 가슴에 묻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생사조차 알길 없는 백구만 생각하면 그동안 백구의 엄마로 산 1년 7개월이라는 시간 속에 함께 만들어간 행복한 기억보다 끝까지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에 그저 먼 하늘만 바라보곤 한다. 사람이든 동물이든 정주고 마음 준 존재를 떠나보낸다는 건 이유를 막론하고 슬픔이라는 것을 많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아프게 느끼고 있다. 오전 내내 들떴던 마음과 달리 그녀를 만나러 가는 내 발걸음은 다소 무거웠다. 그녀가 같은 도시에 살고 있었더라도 이해를 구하며 약속을 다음으로 미루었겠지만 멀고 먼 서울에서 나를 만나러 오고 있는 그녀에게 차마 오늘 만남을 다음 기회로 미루자는 부탁을 할 수 없었다. 그녀가 혼자만의 기차여행을 꿈꾸며 얼마나 가슴 설레었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샤워하고 화장을 꼼꼼히 살필 겨를도 없이 젖은 머리칼을 바람에 나부끼며 집을 나섰다. 그만큼 토요일 오전 1시 30분 전후에 일어난 일로 인해 나는 마음의 여유를 잃고 있었다.
6월 4일 토요일 오후 시간을 함께 했던 그녀는 삼십 대 초반으로 웹 상에서 알게 된 인연이다. 웹상에서 알게 된 인연을 현실 속 만남으로까지 이어간 건 그녀가 처음은 아니다. 2000년 9월 ‘그녀는 특별하다’.라는 칼럼 제목으로 웹상에서 글을 쓰기 시작한 다음 해 캐나다에서 내가 사는 대구로 날아온 여인과의 만남이 있었고 같은 해 자신의 닉네임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내가 비행기를 타고 일산으로 날아간 적이 있었기에. 세 사람의 공통점을 이야기한다면 내 글을 읽은 독자였다는 것과 내게 먼저 마음의 문을 열었다는 점과 여자로서의 매력을 적당히 보기 좋을 만큼 발산할 줄 알면서도 현실 속 자신을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과 커피를 유난히 좋아한다는 점 그리고 우연치고는 무릎을 탁 치고 싶을 정도로 재미있는 발견(?)인 각자의 이름 속에 영문 이니셜이 나와 같은 S가 있다는 걸 꼽을 수 있다.
맛있는 하루가 되어야 할 그날, 예고 없는 태풍 때문에 신경이 부챗살처럼 여럿 방향으로 분산되어 답답한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시간이란 놈은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제 본분을 다하고 있었다. 언젠가 그녀의 방 대문에 걸린 웃는 사진을 본 적 있는 나는 사진 속 그녀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지만, 이전에 만난 두 여인처럼 사진을 주고받지 않아도 몇 번의 편지교감만으로도 충분히 서로 알아보았던 것처럼 그녀 역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을 믿고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몇 번의 전화통화에서 느꼈던 목소리만큼이나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미지가 평소 글을 통해 느꼈던 그대로의 느낌대로 전해져 왔다.
시민회관으로 가서 그날 저녁 7시에 공연할 뮤지컬 ‘FAME’ 티켓을 구매하고 앞산 아래 있는 모 레스토랑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와 내가 찾은 레스토랑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기에 우리 가족이 즐겨 찾는 곳이기도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 날이나 특별한 날에는 예약하지 않으면 줄을 서서 기다릴 정도로 이미 꽤 괜찮은 레스토랑으로 이름 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갈 때마다 실내분위기가 다르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실내장식을 자주 바꾸는 곳으로도 유명한 그곳은 고급레스토랑에 걸맞게 계절별 신선한 음식들을 수시로 바꾸는 홈 바의 음식 맛도 괜찮은 편인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녀와 내가 찾은 그날은 특별히 음식 맛이 좋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그날 진도견인 백구로 인해 상심한 내 마음이 입맛까지 잃게 했는지도 모르지만 내가 좋아하거나 혹은 즐겨 찾는 공간을 대구라는 도시가 처음이라는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에 그곳 레스토랑을 선택했는데 아쉽게도 우리가 찾은 시간이 삼사십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팝송이나 가요를 피아노 반주나 라이브로 들을 기회와 만날 수 없는 시간이어서 그곳을 왜 내가 좋아하는지에 대한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
자신 때문에 주변까지 맑아지고 밝아지고 기분 좋아지는 사랑스러운 여자와의 데이트는 금방 지나가 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내가 즐겨 가는 곳이면서 지적 호기심을 채우기에 딱 어울리는 장소를 찾아 두루두루 함께 즐기고도 싶었지만 눈 깜짝할 사이 달아나 버리는 시간을 잡을 수 없어 욕심만큼 보고 듣고 느끼게 하지 못했다. 뮤지컬 장소로 이동하기 전 잠시 들렀던 두류공원은 문화와 예술, 각종 스포츠시설과 도서관, 놀이시설, 사찰 등 여러 기능을 골고루 갖춘 곳으로 하루라는 시간을 두류공원 일대에서만 보내도 모자랄 만큼 대구시민의 휴식처이다. 생각이 통하고 말이 통하는 그녀와 호수를 바라보기 좋은 벤치에 앉아 삶과 사랑, 여자이야기를 맛깔스럽게 나누고도 싶었고 아름다운 풍경을 눈으로 마음으로 실컷 맛보게 하고 싶었는데 7시에 시작하는 뮤지컬 관람 시간에 쫓겨 연못이라 부르기에는 아름답고 호수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은 물속 작은 정자를 둘러싼 섬 아닌 섬까지 연결된 다리 위에서 사진 두 장을 찍고 공연장소로 이동했다.
공연 시간인 오후 7시를 살짝 넘긴 시간에 도착한 사람들은 우리 말고도 여럿 있었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빈자리가 남아서인지 시간을 넘겼는데도 공연장에 들어갈 수 있었다. 공연을 보는 문화시민의 기본 자질인 시간 지키기에 실패한 우리는 결국 시작장면을 놓치고 말았지만 그런대로 뮤지컬은 재미있었다. 미국 브로드웨이 오리지날 팀으로 구성된 ‘FAME’은 팝가수 ‘아이린 카라’의 노래로 더 잘 알려졌으며 1995년 영국 런던에서 초연 된 이래 전 세계 18개국에서 공연되었다. 뉴욕 링컨센터에 위치한 예술학교 라 구아디아(La Guardia School)의 이야기를 다룬 힘이 넘치는 신선한 뮤지컬이다. 라 구아디아는 매년 1만 5,000명이 넘는 재능 있는 젊은이들이 응시하고 모든 예술가가 한 번쯤 거쳐 가고 싶어하는 세계 최고 경쟁률의 예술학교로서, 연극·음악·무용·노래·악기 등 주요 예술분야를 교육한다. 이 작품은 스타를 꿈꾸는 학생들의 열정과 사춘기 청소년들의 사랑, 선생님과 학생들 사이의 끈끈한 정이 브로드웨이식의 다채로운 춤과 노래 속에 극적이게 그려지는 내용이다. 뮤지컬 ‘FAME’은 그동안 내가 본 다른 뮤지컬에 비해 커튼콜 장면이 유난히 짧아 아쉬웠다. 지난 2월 대구오페라하우스에서 보았던 ‘맘마미아(MAMAM MIA)’ 공연처럼 커튼콜 장면이 길었다면 또한 뮤지컬 속에 나오는 노래를 무대 옆에 설치된 커다란 텔레비전 모니터로 배려해주었다면 그녀와 나는 옆에 앉아있는 낯선 남자의 시선쯤 무시해도 좋을 만큼 열광적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을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동안에도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나이에서 오는 머뭇거림과 신중함, 그리고 내 살아가는 배경들에 대한 보호본능 때문에 웹상에서 은근히 낯가림이 심한 나로 하여금 자신이 지닌 장점을 발견할 수 있게 한 그녀는 만나지 않은 상태에서 느꼈던 그 느낌 그대로 정열적이고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짧은 시간 동안 만난 그녀를 한마디로 이야기하기란 뭣하지만 내가 만난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배경들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볼 줄 아는 여유를 지닌 여자이면서도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한 톡 쏘는 콜라 같은 여자였다. 그런 그녀에게서 나이에서 오는 가벼움이라든가 철없음을 찾아볼 수 없었던 건 두말할 필요조차도 없었고.
뜻하지 않은 일로 인해 그 어느 때보다 아내의 자리와 엄마의 자리가 더 절실히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서 찾아와 준 그녀와의 만남에 기꺼이 마음 보태준 가족들이 밤기차로 떠난 그녀를 배웅하고 돌아온 나에게 뮤지컬은 재미있었는지 만난 사람과는 좋은 시간 보냈는지 저마다 한마디씩 건 내며 반갑게 맞아주어 백구로 인해 무거웠던 마음이 다소 부드러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하루였지만 세상에서 가족만큼 아름다운 관계는 없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기에 내 삶의 노트에 이렇게 표기했다. 오늘 하루는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는 하루였지만 사랑하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절대 슬프지만은 않았다고.
2005년 06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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