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659 시(詩)란 어두운 방 안에서 스위치를 찾듯 더듬거리며 내 안의 기척을 찾아내는 일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는 너에게 손 내미는 일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상처나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이 바래지 않고 영원히 머물 수 있게언어라는 그릇에 담아두는 일 내 마음이 나도 몰래 슬쩍 열어버린 창문그 안에서 또 다른 나를 마주하는 일 2026년 3월 - 喜也 이희숙 2026. 3. 17. 생존의 기울기 생존의 기울기 힘 있는 자는 평화를 외친다하지만 그 평화는 자국의 이익에 기울어져 있을 뿐약자와 타국의 고통에는 눈을 감는다 권리와 의무는 말뿐인 선심으로 흩어지고선과 악의 경계가 흐릿해진 자리진실은 미로 속에서 길을 잃는다 멀리서 보이는 숲은 아름다워도그 속은 치열한 생존의 전장(戰場)큰 나무는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제 그림자 아래를 살피지 않고숨죽인 작은 나무들은햇빛 한 줄기를 차지하려 끝없이 발버둥 친다 세상 어디서든 소리 없는 전쟁은 계속되고우리는 기울어진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평화는 여전히 멀리 있을까마주하는 그 지점에서야비로소 우리는 참된 평화를 찾을 수 있을까 2026년 3월- 喜也 이희숙 2026. 3. 13. 25시를 사는 여자 1대충 해라, 늙으면 병 된다돌아가신 엄마와 언니들이 남긴안부 같은 잔소리를 어깨에 얹고오전 1시 30분, 깨어있던 하루의 문을 닫는다잔물결처럼 어깨 톡톡 두드리며 내게 하는 말오늘도 수고했어 불면의 끝자락엔 흔적처럼 눈이 따갑고2시 30분을 지나 잠깐 비쳤던 꿈의 꼬리를 놓치면어느덧 새벽 5시 40분고3 딸의 아침밥을 지으며 나의 하루는 다시 기지개를 켠다 애들 다 키워 대학 보내면 심심할 거라던인생 선배들의 말은호기심 많고 할 것 많은 내게는 먼 나라 이야기지만아이들 어릴 적이 가장 눈부셨다는 그 말만은이제야 알 것 같은 나이 2십 대부터 이어진 불면의 끈이 최근 느슨해졌다잠드는 시각도 수면의 양도 그대로지만하고 싶은 거 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자기만의 습관을 만들라는 의사의 당부와부엉이처럼 깨어있는 .. 2026. 3. 3. 가장 가벼운 무게 대학병원 안 넓은 도로 한 귀퉁이약국 앞 좁은 보도블록 위에 박스를 펴고무릎으로 꾹꾹 눌러 차곡차곡 쌓는 할머니그 옆을 지나치는 무수한 낮은 발자국 소리 수북이 쌓인 박스내일 아침 쑤셔올 어깨와 무릎이 걱정돼도오늘은 지폐 몇 장 더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할머니의 거친 손은 쉴 줄을 모른다 저녁 여섯 시, 약국 불빛이 하나둘 꺼지고얼마의 돈을 받아 쥘 생각에무거운 줄 모르고 리어카 끄는 발걸음을 재촉하는 할머니그것이 할머니의 유일한 가벼운 짐일지 모른다 모든 것이 잠잠해진 밤할머니의 하루도부디 편안하기를. 시작 노트: 눈 내린 다음 날 오후, 가톨릭대학병원에 정기 진료가 있어서 갔는데 그날따라 환자가 많아서인지 주차장 들어가는 시간이 꽤 걸렸다. 결국 예약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탓에 35분 기다림 .. 2026. 2. 27. 페루 이카 와카치나 사막에서 버기투어를 하다 버기카는 원래 마차를 일컫는 말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모래사막이나 오프로드 전용으로 만들어진 자동차를 버기카라고 하는데 작년 봄, 라오스에서 탔던 버기카보다 훨씬 더 크고 디자인도 현대적이라 좋았다. 버기투어를 위해 비치 신발로 갈아 신고 오아시스 위에 있는 사막으로 갔다. 아뿔싸, 사막 투어 입장료가 있다는 걸 알았지만 가방에 지갑을 넣어두고 버기투어 예약한 곳에 맡겼다. 돌아가려니 8명이 함께 하는 조건이라 우리 가족을 제외한 네 명의 사람들을 기다리게 하는 민폐를 끼치게 되니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마침 그때 예약한 곳에서 만났던 30대 한국인 남성 두 명을 만났다. 자초지종 설명을 하니 흔쾌히 빌려주어 예정된 시간에 버기투어를 할 수 있었다. 우리가 탔던 버기투어 .. 2026. 2. 25. 3월, 그 눈금 없는 계절 동토(凍土)의 끝단에서 꽃은색(色)을 먼저 풀어놓는다아직 추운데채도를 높인 것들이 몰래 담을 넘는다 우리는 앞과 뒤를 세우는 일에 길들여졌다먼저와 나중이라는 눈금을 그어 두어야발밑의 흔들림을 견딜 수 있었으므로 순서대로 피어야 봄이라 믿는 동안개나리와 벚꽃은 차례를 묻지 않고한꺼번에 환해진다 피어남은 누구의 허락을 기다리는 일이 아니라생(生)의 무게가 서로에게 번지는 일 줄 세우던 손을 내려놓고이름 붙이려던 혀를 접는다 조금 느려도길을 헤매어도 괜찮은 것은지금 여기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이 머무름이 이미 도착이기 때문 3월은 질서가 무너진 달이 아니라너와 나 사이의 그늘이 먼저 지워지는 달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웃음이 나고우리 안의 봄이 차올라 서로에게 닿는 달 2026년 2월 - 喜也 이희숙 2026. 2. 23. 이전 1 2 3 4 ··· 110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