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36 기억 너머의 일 생것 같은 잎이 붉게 물드는 것을 보지 못해도 저녁노을 같은 정이 내려앉을 시간을 함께하지 못해도 어딘가에 나의 시간은 남아바람이 지나온 길을 쓸어 스스로 흔적을 지우듯 기억하지 못할 뿐 다만 사라질 뿐 2024년 - 喜也 이희숙 2026. 4. 26. 무사히 저무는 것들 꽃들도 고개 숙여 침묵하는 정오마른장마는 정원의 흙마저 바짝 달구고나무는 보이지 않는 뿌리로생의 비명을 견디고 있다 뙤약볕에 달궈진 시멘트 위를 지나다오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지렁이 한 마리그 가느다란 생애가 가엾어소나무 그늘 깊숙한 곳에 흙으로 덮어 주었다 찬물 한 바가지 정성껏 적셔주니꿈틀거리는 생의 눈짓울컥, 가슴 끝이 뜨거워져듣는 이 없어도 “고맙다, 살아줘서...” 입만 열면 부실 공사 같은 비명이 쏟아지는 계절미칠 것 같은 뙤약볕 아래서도누구 하나 미치지 않으려 두 주먹 불끈 쥐고물세, 전기세, 고물가의 무게를 지고 걸어간다 죽을힘 다해 버티다 보면 살아지는 것이라고단련된 슬픔이 어깨를 다독이는 저녁별일 없이 저물어주는 오늘이 그저 고마워우리는 또 한 뼘, 이 악물고 여름을 건넌다 2024.. 2026. 4. 22. 벚꽃 함성 허공에 걸린 가지마다 팝콘이 튀고따사로운 햇살에 입술 여는 꽃잎남쪽에서 차례로 북상한다 어깨 위로 쏟아지는 햇살가지마다 잘게 내려앉으면세상 모든 폭죽을 모아 나무에 걸어둔 듯한꺼번에 눈부신 함성이 터진다 2026년 3월 - 喜也 이희숙 2026. 4. 20. 여자는무엇으로 사는가 사춘기부터 가슴속 깊이 의문부호로 남은 질문 하나‘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그 해답 없는 매듭을 풀지 못한 채어머니의 거친 세월을 마주합니다 거북등처럼 두껍고 무뎌진 그 손마디 앞에울컥 서글픈 연민이 일어들릴 듯 말 듯 낮은 목소리로"엄마는 언제 가장 여자라는 걸 느끼고 살았어? “"여자는 무슨... 자식들 생각에 그럴 틈이 있어야지. “그 말에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어머니를 모시고 욕실로 향합니다 물기 어린 거울 속에 비친 마른 몸엉덩이뼈만 툭 불거진 그 가녀린 모습 위로붉은 할미꽃 한 송이가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겨드랑이를 씻기려 팔을 들라 하면넘어진다며 행복한 엄살을 부리던 어린애 같은 몸짓여성으로서의 귀한 곳을 씻겨 내릴 때간지럽다며 몸을 비비 꼬던 그 수줍은 모습은수십 년 넘게 잊고 살았던 '.. 2026. 4. 18. 신호의 끝에서 빛의 속도로 달려간 문장이당신의 화면 위에서 잠시 반짝이다 꺼집니다 우리는 단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지만 커서의 깜빡임만큼 집을 짓고전송되지 않을 온기를 안부처럼 전합니다 비록 로그아웃 순간에 흩어질 이름일지라도이 허공의 기록이 당신의 창을 잠시 데운다면나는 이 그리운 오타들 속에 머물겠습니다 2026년 4월 - 喜也 이희숙 2026. 4. 16. 내 안의 여러 개의 방 바람 없이 흔들리는 건나약함 때문만은 아닌전율할 일들이 많기 때문 살면서 전율할 일들이 많다는 건내 안에 여러 개의 방이 있다는 이야기각각의 방마다 다른 색이 있어어떤 방은 고요하고어떤 방은 폭풍처럼 출렁친다 모든 방에서 꿈을 꾸고그 길에서 만난 나를 따라가면또 다른 방의 문이 열린다내가 만든 길, 놓친 길, 잊고 싶은 길도 있다 그 방들을 넘나들며전율 속에서 살아간다방마다 다르게 숨 쉬고 느끼며나의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2007년 - 喜也 이희숙 2026. 4. 14. 이전 1 2 3 4 ··· 6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