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하고 처음간 모임,
동창회는 아니었지만 멀리 부산과 진주에서 온 친구도 있었는데
만나지 못했던 세월동안 모두들 어찌 그리 변했는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어.
공부가 행복의 선적순은 아니지만 초등학교 시절,
남자동기들 성적이 여학생들에 비해 월등히 열세였던 걸 생각한다면
그곳에 참석한 친구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남자동창들의 성장은 믿기 어려울 만큼 놀라웠어.
똑똑했다는 여자친구들은 잘해야 선생님 직업에서 만족하고 사는데 비해
남자들은 대체적으로 사회인으로서 성공한 친구들이 제법 많았다는 사실은
초등학교 졸업 후 동기들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나에게는
대단히 흥미로운 뉴스거리가 아닐 수 없었어.
그 날 한 턱 쏘겠다는 친구는 마흔 셋의 나이지만
국립대학인 K대 전자공학과 정교수가 되었고
초등학교 졸업 후 한번도 본 적 없는 K라는 친구는 모 은행 지점장이 되었고
어린 시절 코를 유난스레 잘 흘렸던 L친구는
10억도 훨씬 넘는 부를 이룬 사장이 되어 있었어.
또 남자동창 중 가장 공부를 잘했던 친구는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누구는 공무원이 되었고 누구는 대기업에 근무하고 누구는 검사가 되었고
누구는 도자기 관련 사업체를 하는데 해마다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어 호응이 좋다는 등
잘살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은 박수를 보내고 싶을 만큼 즐거운 일이었어.
모임에 처음 참석한 나와 달리 자주 얼굴을 본 친구들은 거리낌 없이
이름 뒤에 가시나, 머슴아... 라고 부르며
허물없이 지내는 모습이 내겐 참으로 낯설었지만
오랜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있다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마냥
그 자리에 모인 친구들 모습이 익숙해졌어.
알 것 같아, 나이 들면 어릴 때 친구들과 고향친구들을 만나고 싶어지는 이유를...
그런데 말이야. 식사를 하고 삼사십대가 많이 온다는,
이름만 대면 누구나 다 안다는 모 나이트 클럽에 간 건
처음부터 잘못된 선택이었나 봐.
어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을까...
내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할 만큼 사람, 사람들로 붐볐지.
입구부터 발 디딜 틈 없는 나이트 클럽에서 미련 없이 나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정말 집에서 기다리는 남편에게 미안할 뻔했어.
여자와 남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는 남편생각에
노래방에서 나이트 클럽으로 이동하자는 친구들을 뒤로하고
여자친구 둘과 함께 슬그머니 자리를 빠져나왔지,
남편이 밤 12시 30분이 넘은 시간 집에 들어간 날 보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고 대문 앞에서 은근히 긴장을 했는데
뜻밖에도 12시 넘을 줄 알았다며 더 이상의 언급이 없었지 뭐야,
그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남아 6년만의 화려한 나이트 클럽 나들이를 하는 건데...
아냐, 아냐, 괜스레 한번 해본 농담이야.
어이, 모 은행 지점장 친구!, 넌 날 기억했지만 솔직히 난 널 모르겠더라.
사투리 사용하지 않는 날 보고 넌 서울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괜스레 장난 걸고 싶어했지만 솔직히 그 날 말로는 너, 나 당할 재간이 없었지?
야, 교수양반!, 상금 탔다며 대구와 근교에 사는 친구들에게 한턱 쏘겠다며
자리는 네가 마련했는데 모임날인 토요일 오후,
네 아버지의 갑작스런 뇌출혈 소식에 얼마나 놀랬니?
수시로 친구들과 연락하며 갈 수 있는 방향으로 하겠노라 했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시각까지 끝내 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모처럼의 널 볼 수 있는 기회가 날아가 버려 서운했어.
어이, L사장, 결혼 전 테니스 라켓 들고 가는 나를 용케도 알아본 너이기에
새삼 널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당당한 사회인으로 선 네 모습에 조금 놀랐다.
내 기억 속의 넌 코도 많이 흘리고 야무지지 않은 아이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참에 그런 기억은 모두 싹 지워 버려야할까 봐.
건설업 관련 사업한다며 명함을 건 낸 또 다른 L사장,
초등학교 시절, 넌 참 조용한 아이였는데
지금은 어떤 분야든 간에 열심히 하는 것 같아 보기 좋았어.
참석하지 못했지만 조금 전 전화통화에서 밥 한끼 하자며 놀러오라는 친구,
아니, 날더러 언제든 불러달라는 친구,
꿈께 라고 농담반 진담반 말했지만
참석한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좋은 너라는 걸 알기에
모처럼의 안부 기분은 좋았어.
동창회는 아니지만 친구 축하하기 위해서 모인 자리에 나와 준 여러 친구들,
그동안의 살아온 환경이 달라 생각하는 것도 행동하는 것도 많이 달랐지만
모두들 반가웠다. 못 본 동안의 세월을 느끼지 못할 만큼...
'깊고 낮은 읊조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읊조림(일백 다섯) - 이희숙 (0) | 2007.02.09 |
---|---|
읊조림(일백 넷) - 이희숙 (0) | 2007.01.19 |
읊조림(일백 셋) - 이희숙 (0) | 2006.12.21 |
읊조림(일백 둘) (0) | 2006.11.21 |
읊조림(일백 하나) - 이희숙 (0) | 2006.1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