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저녁 먹고 쉬고 있는데 신랑 휴대폰에 전화가 울리네.
바싹 붙어있던 내 귀에까지 들리는 귀에 익은 목소리,
옛날 오스카 극장 근처 어디에서 남정네 셋이서 술 마시고 있으니 나오라네.
편안한 차림으로 있던 울 신랑 나가기 귀찮은지
이미 많이 마신 것 같으니 얌전히 집에 가라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이번엔 아예 집 전화로 나오라고 공세네.
안 되겠다 싶은지 차 놔두고 택시 타고 간다네.
너무 늦지 말고 적당하게 마시라며 대문까지 배웅해줬네.
집에서 나간 시간이 저녁 9시니 12시 전에 돌아올 거라고 기대도 안 했지만
여럿이 함께 있는 자리에 언제 오냐고 전화하는 것도 그렇고 해서 마냥 기다렸더니
간 큰 이 남자 새벽 1시 30분에 들어왔네.
늦어서 미안한지 벨도 누르지 않고 직접 열쇠로 열고 들어왔네.
발그스레한 얼굴로도 늦은 시간 돌아오는 딸이 걱정됐는지
거실로 들어서며 하는 첫 말이 왔냐고 묻네.
막 잠들었으니 그냥 두라고 하니 알았다며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꺼내 불쑥 내미네.
술만 마신 게 아니고 밀린 대금도 받았다며 은행가지 말고 그냥 쓰라네.
묻지도 않았는데 술 몇 병 마셨다고 자백하네.
평소에는 술 한 방울 입에도 안 대다가
어쩌다 술 마실 자리가 생기면 자주 마시는 사람들보다 주량이 세네.
그래도 결혼 18년 차로 사는 동안 술 때문에 실수 한 적 없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고 해서 잔소리 하지 않았네.
내 남자라 불리 우는 이 남자,
몸이 뜨거운지 마음이 뜨거운지 간에
겨울에도 이불 밖으로 발 내놓고 잔다네.
뜨거운 건 딱 질색인 이 남자,
신통하게도 잠잘 때는 연리지처럼 신랑 몸에 붙어살다시피 하는 나를
이불 밖으로 밀치기는커녕 숨 막힐 정도로 감싸 안고 자네.
언젠가 친정 엄마한테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했더니
천생연분이라서 그렇다네.
어제는 높은 온도에 알코올까지 섭취했으니
여름이면 홀라당 벗는 걸 좋아하는 버릇 나왔네.
가스 전원도 안 켜고 찬물에 샤워하네.
덕분에 나까지 잠이 확 달아나버렸네.
새벽 2시30분이 넘은 시간에 잠들었네.
오늘 모의고사 치는 딸이 이른 아침 시간에 깨워달라고 해서
세 시간도 못 자고 일어났네.
두 아이 등교를 위해서 신랑도 4시간 남짓 자고 일어났네.
간밤에 술을 많이 마셨으니 피곤할 법도한데
아이들 학교 보내고 돌아온 신랑, 아무렇지 않은 듯
나래(우리 집 암컷 진돗개 이름)밥 주고 주변 청소하고
정원이랑 화분에 물주고 진딧물 죽이는 약까지 치네.
아침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나니 나른한지 출근할 생각을 안 하네.
한 시간만 자고 나간다는 신랑 말에 설거지도 미룬 채 덩달아 누워버렸네.
이런 일은 내 삶에 거의 없다시피 한 일이네.
처음에는 피곤하니 눈만 감고 있어야지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잠들어버렸네.
신랑전화에 벨이 울려 신랑은 출근했는데 나는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네.
비몽사몽 하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약속을 지키기엔 시간이 어중간하네.
진짜 오늘은 기차 타고 화려한 외출을 하고 싶었는데
마음 따로 몸 따로인 몇 시간이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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