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가 말했다. 아카시(일명 아카시아나무) 나무아래 가지 말라고,
영문을 모른 채 이상한 눈빛으로 낯선 이를 훔쳐보았다.
그 순간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그 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턱 선이 날카롭고 눈매가 부드러워 보이는 낯선 이에게서 아주 익숙한 바람의 노래가
잔잔한 선율처럼 끊어질 듯 이어지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순간 보랏빛 꽃이 조롱조롱 열린 오동나무를 연상했다.
몸으로 소리를 내는 악기,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신비한 음률이 들리는 착각마저 들었다.
누군가를 첫눈에 알아본다는 것은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을 수 있다고 말하거나 흘러가는 구름을 잠시 쉬어가라고 청하는 것과 같이 환상일지도 모른다. 첫 만남, 첫 느낌, 첫사랑... 운명은 늘 처음이라는 말과 함께 마지막이기를 원하지만 결코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가끔 아주 가끔은 뜨거운 불 속으로 사라져 버린, 내가 쓴 소설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나와 만날 때가 있다. 마치 내가 소설 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처럼 아직도 사랑이라든지 운명이라든지 하는 말에 은밀히 들뜨는 마음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누군가와 그 어떤 만남을 원한다는 것은 아니다. 아직은 삶이라는 커다란 우주를 이야기하는 것보다 사랑이라는 보드라운 설렘을 이야기하는 것이 더 편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결혼한 여성은 선뜻 그 사랑을 솔직하게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말하는 사람의 입장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견해 차이에서 오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생각의 자유를 어느 지점에서 묶어버려 오히려 침묵으로 일관함이 더 쉽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도 여전히 사랑에 관한 시를 쓸 것이다.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사랑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고 귀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나는 내가 누구의 아내이며 엄마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곤 한다. 하루 중 잠깐 동안에 일어나는 변화지만 그 순간은 오로지 나만 존재하고 나만 느끼고 싶어 하는 욕심이 있음을 안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도 내 이름에 아주 익숙하다. 그 익숙한 감성은 동갑내기 남편에게까지 욕심을 부린다. 나라는 존재가 언제까지나 첫 만남 그 느낌처럼 설렘으로 가득하기를, 그리하여 함께 있어도 늘 그리운 사람이기를 원한다. 나는 매일 수채화 같은 사랑을 소망한다. 비록 소설 속에 나오는 환상 같은 것일지라도.
2001년 05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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