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오후, 한주 미루었던 해인사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해인사로 접어드는 길은 느낌부터가 달랐다. 끊어질 듯 막힌 듯 이어져 있는 도로 옆으로 하늘 향해 뻗어있는 나무를 보며 봄과 여름에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를 짐작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산모롱이를 돌면 삽시간에 길이 끝날 것만 같은 아쉬움과 고목나무의 웅장한 자태, 보이는 풍경마다 한 폭의 수채화를 연상시켰다. 산을 품고 있는 바위, 나무, 물, 심지어 바위틈에 자란 이끼까지 어느 것 하나 어여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운암 치인리 해인 초등학교’라고 적힌 아담한 학교를 돌아 마중 나와 있던 사내아이를 만났다. 한눈에 봐도 똘똘해 보이는 심성이 고운 아이는 우리 가족이 묵을 집 막내아들이었다. 산 속이라 그런지 도시에서 바라보는 별들의 숫자와 밝기가 너무도 달랐다. 두 아이의 부모라는 사실도 잠시 잊은 채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사람들처럼 낙엽 위로 무서리가 별처럼 내려 반짝이고 있는 그 길을 남편과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한참을 걸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은 우리가족이 신세를 진 집 가장과 함께 해인사 절에 잠시 다녀오겠다는 말을 하고는 이내 자동차로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내 앞에 나타난 남편은 얼굴 가득 기분 좋은 웃음을 바람결에 날렸다.
"무슨 좋은 일 있어?"
"남들은 가기 힘든 곳에 갔다 왔지. 스님들이 공양을 준비하는 곳에 구경을 갔는데 공양하고 가라는 걸 희야와 애들이 기다릴 것 같아 그냥 왔지... "
차 한 잔 대접하며 스님들이 직접 기른 배추 세 포기를 줘서 가져 왔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행 왔다가 우리나라 3대 사찰중 하나인 해인사에서 귀한 선물로 배추를 받았으니 아내인 내게 자랑 할 만도 했을 것이다. 해인사(海印寺) 가야산은 해돋이 십승지(十勝地) 또는 금강산이라고도 불린다. 해인(海印)이라는 이름은 일렁임이 없는 바다에 만물의 형상이 그대로 비치는 것과 같이 번뇌가 없는 마음에는 만물의 이치가 그대로 드러난다는 의미 곧, 부처님의 깨달은 모습 우리 중생들의 본래모습이라는 깊은 뜻이 담겨 있다.
해인사를 가려면 걸어야 하는데 부끄러운 일이지만 해인사 일주문까지 차로 갔다. 우리가 묵은 집 가장의 빽(?) 덕택에... 가는 도중 성철스님의 사리탑 앞에서 차를 세웠다. 대학졸업 후, 불심이 강한 친구를 따라 친구 몇 명과 함께 경북 영천에 있는 은혜사에 들른 적이 있었는데 그곳 주지스님의 차 대접을 받으면서 스님 방 한 켠에 쌓여 있던 책들 중 눈에 띈 성철스님의 법어집을 잠깐 동안이지만 볼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는데 몇 몇 구절은 오랫동안 잊혀 지지 않고 있었던 터에 우리가 묵은 집 가장의 이야기, 해인사 터미널 윗동네(지금의 치인리 해인 초등학교 동네)조성할 당시 성철스님께서 마을은 산 아래에 있어야 살지 산 위로 자꾸 올라오면 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다른 의견이 더 크게 작용하여 마을을 위로 조성했는데 해인사 관광이 오히려 옛날보다 훨씬 더 위축되어 집집마다 늘어나는 빚으로 살기가 힘들어졌다는 이야기가 맞물려 마음으로나마 성철스님을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서였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시고 있는 주변은 깨끗하고 아주 넓었으며 사리탑으로 올라가는 길 아래에는 자갈을 깔아놓아 그 신성한 곳에 흙을 묻힐세라 세심한 부분까지 신경을 써 놓았다.
11월인데도 휴일이라 그런지 나들이객들로 해인사는 제법 시끄러웠다. 시끌벅적 장터 같은 웅성거림 속에서도 눈은 스치는 사람과 오래된 고목, 불교적인 색채를 감상하느라 쉴 틈이 없었고 이것저것 메모하는 나를 보고 남편은 사진기로 가능하면 담아 주겠다고 내 수고를 덜어주려 애썼다. 언제나 곁에서 그림자처럼 내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 그가 있어 이번 여행도 또 즐거울 거라는 걸 예감하며 해인사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팔만대장경(국보 제 206호, 보물 제 734호, 고려각판(刻板) 81,340장)을 구경하다 눈에 익은 사진 하나를 발견했다. 장경각 연꽃 그림자 사진이 액자에 넣어져 걸려 있었는데 스님의 합장한 모습이 그 액자 안에서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입동이 지난 산사는 해 그림자도 찾아보기 힘들었지만 여름날처럼 연꽃 그림자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 건물의 처마 끝과 여러 가지를 두루 살펴보았다. 연꽃 그림자를 직접 볼 수는 없었지만 세밀히 관찰한 결과 연꽃 그림자는 충분히 만들어 질 수도 있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앞 뒤 건물의 양식이 해 그림자와 접목하면 바로 그림이 그려졌다. 그래도 나는 보이지 않는 그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아 똑 같은 사진이 있으면 사고 싶다는 생각에 물어 보았지만 팔지 않는다는 대답만 들었다.
고원 최치원 선생의 벼슬인 한림학사(헌강왕 때)라는 이름을 본 따 부르게 된 학사대(學士臺)는 최치원 선생이 지팡이를 거꾸로 심었다는 일화로 더 우리에게 알려진 곳이다. 아름드리 큰 나무 앞에서 남편과 함께 다정한 포즈로 몇 장의 사진을 찍고 용탑선원 아래 있는 외나무다리 쪽으로 내려갔다. 객지에서 온 젊은 여성만 해마다 몇 명씩 변을 당하고, 들리는 소문으로는 변을 당한 사람은 모두 죽는다는 그 두려운 외나무다리를 남편과 딸아이는 건너지 않고 아들 녀석의 고집에 결국 두 모자(母子)만 건넜다. 겨우 여섯 살인 아들은 "엄마 조심해, 난 겁 안나. 난 남자니까..."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말하며 오히려 나를 더 챙겼다. 소문만으로도 두려운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동안 아들의 챙김에 화답하듯 "엄마는 널 사랑해..." 라는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며 건넜는지 모른다. 해인사 곳곳을 누비면서 만난 아름드리 고목과 계절을 잊은 채 서둘러 봄 이야기를 전해주는 생강나무와 보기만 해도 재미있는 꽈배기 모양의 다래나무, 참나무라 불리는 신갈나무, 졸참나무, 까치박달나무 그리고 복조리 만드는데 사용하는 조릿대 등 해인사는 그야말로 주인이 산림이었다.
남편과 딸아이는 먼저 내려가서 기다리고 아들 녀석의 걸음에 맞춰 천천히 더 둘러보면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 곳곳에 쌓아 놓은 돌탑을 발견한 아들 녀석의 뜻하지 않은 제안(엄마, 우리 소원 빌어요.)에 깊은 산중까지 와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소원만 챙겼다. 돌탑 아래에 떨어져 있던 조그맣고 예쁜 둥근 돌 하나를 주워들고는 내 아이가 사는 세상이 둥글었으면, 내 사랑하는 가족이 모두 지금처럼 건강했으면 하고......
2000년 11월 - 喜也 李姬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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