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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과 느낌

인연(因 緣) - 이희숙

by 시인촌 2004. 2. 9.

불혹(不惑)의 나이를 넘긴 지금에도 인연이라는 말을 들을 때면 어릴 적 무지개를 볼 때 느낌처럼 심장이 하염없이 뛰거나 또는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뻗쳐오는 서늘한 기운으로 인해 불현듯 목이 메고 콧날이 시큰거리는 묘한 감정에 종종 사로잡힌다. 문득 스치듯 쏟아지는 감정들이 가을바람처럼 순식간에 가슴속을 비집고 들어오면 내 안 곳곳에서 유영하는 여러 빛깔의 언어들은 추억이라는 이름의 기차를 타고 지나간 시간 속으로 먼 여행을 하기도 한다.   
 
인연이라는 말을 사랑, 희망, 그리움 다음으로 좋아한다. 특별히 인연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이유는 타고난 천성이 보드랍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인간관계가 삶 속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아는 동시에 사회적인 동물로서 살아가는 인간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걸 이미 알아버린 탓이요 더 나아가 좋은 인연을 맺으면 한 사람의 인생을 무궁무진한 에너지로 전환시킬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는 까닭이다.  

마음 깊은 곳에 해바라기 씨만큼이나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인연을 하나 둘 떠올릴 때면 햇살 좋은 봄날 하나 둘 피어나는 꽃처럼 어여쁘다.  하지만 어떤 인연은 이름 석자를 미처 다 부르기도 전에 가슴을 콕 찌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 수많은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지만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진정으로 나에게 영향을 끼친 인연과 나 또한 그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혹여 라도 나라는 사람이 어떤 이에게 있어서 아픈 인연이나 슬픈 인연으로 남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난달 비행기를 타고 가서 만난 아름다운 두 여인과 불혹의 나이를 살아오는 동안 내 삶을 많이 변화시킨 몇 안 되는 인연들을 떠올리며 이 글을 쓴다.


2000년 필자가 Daum 칼럼 여성부문에서‘그녀는 특별하다’라는 제목으로 칼럼을 쓸 때 알게 된 두 여인 중 한 여인은 서울태생이지만 캐나다로 이민 가서 살고  다른 한 여인은 일산에서 사는데 두 여인 모두 나랑 생각하는 주파수가 비슷해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자주 만나는 사람처럼 특별한 사이다. 생각이 통하고 느낌이 통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보고 싶은 몇 안 되는 사람 중에 속한 그녀들이다.


캐나다에 살고 있는 여인은 우리나라에 방문할 기회가 생겨 서울에 머무는 동안 바쁜 일정 속에서도 기차를 타고 우리 집을 방문해 아름다운 만남에 대한 예쁜 기억을 선물해 주었다. 일산에 사는 여인은 2001년 여름, 그녀를 만나기 위해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처음 만난 어색함 없이 아름다운 일산호수공원에 앉아 일요일 오후 한때를 즐겁게 보내고 당일 저녁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왔다. 그녀 또한 햇살 좋은 어느 날 우리 집으로 놀러 와 짧은 시간이었지만 만남의 기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작년에는 그녀의 가족들이 경주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우리 집으로 놀러 오기도 하여 매년 한 번씩은 얼굴 마주 할 수 있었던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이렇게 몇 년에 한 번 혹은 일 년에 한 번 만나는 우리들이지만 불혹의 나이를 갓 넘긴 세 여자는 친구라 서슴없이 부르며 보고 싶어 한다. 흔히들 여자 셋이 모이면 그 수다스러움에 그릇이 깨진다는 표현을 하지만 각각의 개성이 뚜렷하고 삶의 태도가 분명한 여자 셋이 만나서 나눈 이야기는 삶과 사랑, 여자이야기가 주를 이루었으며 표현 또한 진솔했다고 그날의 만남을 즐거운 마음으로 떠올려 본다.


세 여자를 느낌대로 분석한다면 2년 전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영구귀국해 일산에 삶의 터전을 잡은 친구는 훤칠한 키에 목이 긴 멋스러운 여인이다. 나만큼이나 유난히 커피를 좋아하는 그녀에게서 나는 종종 깊고 따스한 가을 색채와 우수에 어린 여린 그늘을 동시에 느낀다. 하여, 나는 이 가을 동안만큼은 그녀를 순수한 가을 여인이라고 부르고 싶다. 

또 다른 친구는 웹 상에서 사용하는 자신의 닉네임만큼이나 통통 튀는 시원한 성격의 소유자다.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가 매사에 긍정적이고 분명한 성격 때문이기도 하지만 열정으로 똘똘 뭉쳐진 여인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와 통화를 하면 덩달아 기분이 상승되는 걸 느낀다. 그런  그녀에게서 정열의 계절 여름을 떠올리곤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인 나는 아담한 체격의 소유자로서 귀엽거나(?) 혹은 여성스러운 느낌이 몸에 베인 봄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보수와 개방, 이성과 감성 사이에서 적당히 긴장하며 사는 나는 지극히 감성적이면서도 생활인으로서의 나는 매우 이성적인 사람이다.

두 여인 모두 나만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올해 초봄 같은 일산에 산다는 이유로 내가 두 사람이 친구가 되어도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소개해 주어 지금은 대구에서 사는 나 보다 같은 도시에 사는 그녀들의 왕래가 더 잦은 편이다. 두 친구 다 내게 좋은 친구를 소개해 고맙다고 인사할 정도니 참으로 다행이다 싶다. 이렇게 만난 세 여자의 닮은 꼴이 있다면 비슷한 시점에 태어나 생일이 같은 겨울이라는 점과 커피를 즐겨 마신다는 점, 그리고 불혹의 나이에도 여자로서의 느낌이 강하고 자신이 선택한 삶이라는 울타리를 사랑이라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바라보며 가꾸어 나갈 줄 아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문득, 아주 오래전 어느 겨울날이 생각난다. 소외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수녀가 되어 내 인생을 바쳐도 후회하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생각의 발자국을 따라 찾아간 충남 당진에 위치한 작은 성당... 그곳에서 만난 인연들과 보낸 사흘은 평생 잊지 못할 고마운 추억으로 떠올릴 때마다 가슴을 따사롭게 한다. 내 존재의 이유를 깊이 느끼게 해 준 고마운 사람들... 언젠가 꼭 한 번 찾아뵈어 내 사는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다짐하며 다시 찾은 그곳에는 이 십 대 초반에 만났던 인연들은 어디론가 떠난 지 오래여서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그 모습 그대로 나이를 먹지 않고 내 가슴 한편에 늘 고마운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디 내게 있어 그들만 아름다운 인연이겠는가?
부부의 연을 맺고 사는 남편과 부모자식 간의 인연은 끊을 수 없다 해서 천륜이라 부르는 부모님 또 사랑스러운 나의 아이들...

올해가 가기 전에 우리 집에서 만날 것을 약속한 두 여인과
나라는 사람이 지닌 여러 가지 색감을 그대로의 깊이로 인정해 주는 사람 그리고 지금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사는지조차 알지 못하지만 늘 건강했으면 하고 가끔 떠올리는 추억 속의 인연들과 얼굴 한 번 마주한 적은 없지만 웹 상에서 알게 된 인연들...
모두에게 나직하지만 깊고 따스한 언어로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들로 인해 내 삶이 더 풋풋했으며 따스했노라고......

 

 

2003년 09월 20일 - 喜也 李姬淑